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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Aug 09. 2020

세 번의 야반도주

원도심 주택 구매기 4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았다. 우리가 살던 전셋집은 10월 중순에 빼줘야 하는데 우리가 들어갈 집 리모델링 공사는 11월 중순에나 끝날 예정이었다. 리모델링을 고려해서 매매를 서둘렀건만 하필이면 추석이 끼는 바람에 공사기간이 늘어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거의 한 달을 밖에서 지내야 했다. 어디서 한 달을 버텨야 하나. 엄마네로 들어가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한 달 살 집을 빌리기에는 돈도 없었다. 나는 엄마네로 아내는 서울에 사는 친구네 집으로 가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다. 모든 게 막막했다.


그런데 아픈 건 소문을 내라고 했던가. 우리의 딱한 사정을 듣고 뜻하지 않던 온정의 손길이 이어졌다. 송도에서 과외방을 하는 아는 형이 괜찮으면 와서 지내라는 거였다. 과외는 아파트에서 하는데 초저녁부터 밤 10시까지만 한다고 했다. 나머지 시간은 우리가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더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제주로 내려간 회사 후배가 그동안 자신이 지내던 송도 오피스텔이 비었으니 그곳에서 지내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기간도 한 달 정도 남았다고 했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을 수가 있을까. 게다가 후배의 오피스텔은 그렇게 멋지다는 송도 신도시 야경을 볼 수 있는 호텔 레지던시였다. 인천 구도심 주택으로 이사 가기 전 마지막으로 보내는 신도시의 센티한 날들이 될 것 같았다.


살던 짐은 이삿짐 컨테이너에 맡기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싸서 오피스텔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밥은 또 해 먹어야 하고 커피도 내려먹어야 했다. 옷이며 뭐며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짐은 생각보다 많아졌다.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대봉감이 있었는데 홍시가 돼야 먹을 수 있었기에 이것도 몇 개 챙겨가기로 했다. 감이 다 익어갈 때쯤에는 우리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 오피스텔에 들어가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야반도주하는 것도 아니고 살림살이 주렁주렁 들고 이게 뭐람.


송도 신도시에서의 밤


그런데 그렇게 오피스텔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부동산에서 오피스텔 계약을 앞당겨하는 바람에 내일 오전에 집을 비워야 한다는 후배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내일은 나도 아내도 회사를 가야 하는데 결국 오늘 밤에 짐을 빼야 했다. 하필 둘 다 야근이라 10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야반도주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갈 곳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시 과외방으로 가기로 했다. 짐을 싸는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집 없는 설움이란 게 이런 걸까. 우리가 정말 오갈 데 없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눈물이 많은 아내는 아마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고 이번에는 나도 따라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버티면 돌아갈 집이 있다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얼마나 고달플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한밤중에 다시 짐을 싸며 아내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외방은 지내기가 편치 않았다. 아파트였지만 남의 사무실에서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저녁에 어디서든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센티할 걸로 기대했던 신도시의 밤은  날이 추워져서인지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또 다른 귀인이 나타났다. 평소 우리 부부와도 친하게 지내던 분인데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더니 학익동에 있는 어느 집을 보여주었다. 어머님이 하시던 가정집 피아노 학원인데 괜찮으면 이곳에서 지내도 된다고 했다. 지금은 집으로 쓰는데 잠시 비어있는 상태라고. 아내와 나는 즉시 짐을 쌌다. 또다시 야반도주. 이제 짐을 싸는 것도 익숙해져서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감은 점차 홍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피아노 집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다. 아내는 모든 게 낯설었겠지만 오랜만에 초등학교 근처에 오니 나는 감회에 젖는 나날이었다. 어느 곳은 내가 학교를 다니던 그때와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내가 다니던 골목길과 그 길에서 놀던 친구들의 집도 그대로 있었다. 우리가 거처한 곳도 마찬가지로 옛날 집이었는데 어디에 피아노를 두고 가르치셨을까 싶을 정도로 작았다. 입식 세면대도 식탁도 없었지만 다행히 그동안 사람이 살았던 온기가 있어서 지내기는 송도보다 훨씬 나았다. 신기하게도 가장 불편한 이 집이 우리에겐 가장 포근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피아노 소리가 어디선가 은은히 들리는 듯했다. 홍시가 익기 시작해 하나를 까먹었다. 홍시가 놓인 곳은 원래 제자리 인양 자연스러워 보였다.


피아노 집에서 홍시가 익고 있다


집을 나온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가는데 또 날벼락이 떨어졌다. 공사가 생각보다 늦어질 것이고 게다가 공사비도 그만큼 늘어날 거란 얘기였다. 늦어도 11월 중순이라던 입주일은 하순으로 늘어났다. 날은 추워지기 시작하고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피아노 집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입주일이 또 연기될 것 같다는 전화가 왔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1월 30일에는 무조건 집에 들어갈 거니까 그때까지 마무리해 주세요."


아내의 싸늘한 말과 함께 초겨울 한파가 찾아왔다. 나는 마지막 홍시를 먹었다. 돈도 시간도 그리고 홍시도 이제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구도심 주택살이 봉봉 TIP


1. 이사 날짜가 안 맞으면 여러모로 괴롭습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결국 시간은 가고 집은 남습니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지만 저희 같은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면, 단기 임대를 알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에어비앤비나 방구하기 어플을 찾아보면 한달살이 집들이 꽤 많아요. 컨테이너에 짐을 맡기는 비용은 보통 하루 1만 원이니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

 

2. 공사하는 집에 수시로 찾아가 진행상황을 살피는 건 좋아요. 현장에 가보면 상의할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물론 이런 걸 싫어하는 현장 소장님들도 있습니다. 일정이나 진행상황을 계속 체크하는 것도 기간 내 공사를 마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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