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띵띵, 띵띵 " 내음 씨는 알람이 울리는 전화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집에 거의 다 와가는데 배달 앱에서 알람이 울리지 않아 오늘은 그냥 공치는 날인가 생각했다. 지난달부터 시작한 배달 알바는 내음 씨 삶에 꽤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었다. 다이어트를 위해서 일부러 회사에서 집까지 30~40분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집 방향과 맞는 적당한 루트의 배달을 하고 한 번에 3,400원에서 많게는 6,000원 가까이 수입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무작정 걷는 것보다 GPS로 새로운 루트를 경험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 5,400원 짜리네. 거기다 반포동이고 루트도 좋네.' 내음은 기분이 좋았다. 금액도 평소보다 높았고 루트도 집 방향과 딱 맞아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돈가스 집에서 배달할 것을 픽업하고 한 15분쯤 걸었을까 다시 한번 배달할 주소를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꺼내서 보았다. ' 동광로 437, 동광로 437' 주소를 확인하는데 잠시 느낌이 싸해서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데 아까는 분명 아무도 없던 길에 웬 노인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 이크크' 내음은 살짝 몸을 돌려 옆으로 비껴가는데 워낙 가까운 거리여서 오른쪽 어깨가 노인의 야구모자에 약간 닿았다. 덩치 큰 내음에 비해 노인은 키가 작아 내음의 어깨가 노인의 뉴욕 양키즈 모자챙 부분에 부딪혀 지나갔다. " 죄송합니다 "
내음은 돌아보지도 않고 죄송합니다를 외치고 빠르게 걸었다. 앱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평가가 안 좋아지고 나중에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어서 은근히 신경 쓰였다. 그리고 소위 AI라고 하는 시스템에서 정해지는 시간은 내가 동의한 핸드폰 위치 정보에 기반하여 굉장히 타이트하게 시간을 주어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빨리 걸어야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음은 거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앞을 보니 아파트 단지 정문은 왼쪽으로 150미터 정도 가면 되는데 바로 오른쪽에 쪽문 같은 것이 있었다. 핸드폰을 보니 쪽문으로 가면 더 가까울 것 같았다. " 휘이이잉~ "
내음이 쪽문으로 발을 디디는데 갑자기 미친듯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너무 바람이 세서 내음은 순간적으로 문 사이에 멈추어 서서 눈을 질끈 감고 바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 이게 뭐지, 많이 맡아본 냄새인데'
내음은 갑자기 따뜻한 꿀차 같은 냄새를 맡았다.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인데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다. 바람이 그치자 내음은 눈을 뜨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 부우웅~ "
내음의 앞으로 세피아 자동차가 지나갔다. 굉장히 옛날 차인데 요새도 저 차를 타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아파트 담 옆에 포장마차에 붙은 ‘호떡 50원’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싸다고 생각했다. ' 어 이게 뭐지? '
내음은 눈 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세피아와 같은 옛날 자동차는 한 대가 아니었다. 포니도 보였고 스텔라도 지나가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높은 아파트는 온대 간대 없이 단층 주택들이 모여있고 지나가는 사람의 옷차림도 TV 드라마에서 보던 예전 사람들의 것이었다. " 띵띵띵띵"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도착시간 1분 초과 알람이었다. 머리가 멍했지만 일단 배달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휴대폰에서 보이는 파란 점으로 표시된 목적지로 걷기 시작했다. 내음은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의 집은 파란색 대문의 단층 주택이었다. 담장도 그리 높지 않아 마당이 내려다 보였다. 마당에는 웬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로 세수를 하고 있었다. ' 어떻게 하지 '
내음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 누구세요 " 마당에서 세수를 하던 남자가 어느샌가 일어서서 내음을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껴 보니 문 앞에 이상한 남자가 서 있으니 궁금한 것이 당연할 것 같다. 남자는 문을 열고 내음에게 걸어왔다. " 아.. 네... 저기 배달인데요 " " 배달이라뇨 무슨 배달이요 " " 아.. 그게.. 이거.."
내음은 손에 든 비닐 백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돈가스를 주면서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해야 하나 순간 고민했다. 그런데 비닐 백이 이상했다. 그건 돈가스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낡은 줄무늬 담요가 들어 있었다. " 이게 뭔데요 "
남자는 멍한 상태의 내음에게서 비닐백을 받아 담요를 꺼냈다. 처음에는 귀찮고 짜증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담요를 보고 눈이 점점 커졌다. " 어.. 이거 어디서 나셨어요? 도대체 누구세요? "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내음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은 충혈되었고 담요를 쥔 두 팔은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자는 금방이라고 울 것 같았다. 내음 씨는 그 남자의 눈 속에서 또렷해지는 영상을 보았다. 남자는 증학교에서 잘 나가는 야구선수였다. 중학생이지만 실력이 뛰어나 대학교와 프로 스카우터도 그 남자를 보기 위해 학교로 찾아올 정도였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여름 전국대회 결승에서 결승점을 얻기 위해 홈으로 뛰어들던 중 상대팀 포수와 부딪혀 큰 부상을 입게 된다. 부모 없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남자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수술은 받았지만 야구장을 오랫동안 떠나게 되었다. 야구를 하면서 땀을 흘리고 또 그 대가로 가진 뛰어난 야구 실력으로 할머니와 세상에 인정을 받는 것이 인생에 전부였던 그 남자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고 그런 세상이 너무 미웠다. 그래서 집을 나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 할머니가 항상 덮어주시던 거였어요 "
남자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었다. 할머니는 추운 겨울에도 남자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수고했다며 줄무늬 담요를 덮어 토닥거려주시곤 했었다. 난방비가 무서워 항상 서늘한 방이었지만 할머니가 덮어주던 그 담요 속에서 남자는 너무 따뜻했다. 그리고 내일 더 열심히 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고맙습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어요 " 남자는 그 담요를 소중히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멍하니 서있던 내음 씨는 퍼뜩 배달시간 초과가 생각나 휴대폰을 꺼내어 배달완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아까 맡았던 따뜻한 꿀차 냄새가 다시 나고 강한 바람이 다시 불었다. 내음 씨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 어... 뭐야.. 무슨 일이야 이게 ' 내음 씨가 눈을 다시 뜨자 저 멀리 유명한 호텔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이 주변에서 가장 큰 빌딩이어서 웬만한 먼 거리에서도 보이는 고층 빌딩이다. " 띵동, 배달이 완료되었습니다 "
갑자기 앱에서 알람이 울려 휴대폰을 보니 배달완료 알람이 보였다. 내음씨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멍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길거리에 계속 서 있을 수가 없어 일단 집 방향으로걷기 시작했다. 눈 앞에 줄무늬 담요와 남자의 모습이 계속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내음 씨가 사라진 후 하얀색 야구 모자를 쓴 노인이 귀에 이어폰을 꽂은채 핸드폰을 보면서 걸어왔다. 노인이 보고있는 핸드폰에는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 MVP를 차지한 선수가 토크쇼에 출연하여 MC의 질문에 이런 저런 답을 하고 있었다. MC는 선수가 두 손에 소중하게 들고 있던 줄무늬 담요에 대해 질문을 했고 선수는 울먹이며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