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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퇴근길이 더 어렵다

by 심내음

< 금요일 퇴근길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

‘휴우....’

민재는 PC가 꺼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번 주도 이렇게 끝이 났다. 금요일인 오늘 야근을 하지 않고 정시에 퇴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된다. 물론 금요일인 오늘도 혹시나 토요일인 내일도 일요일도 야근을 하거나 출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 세상에 수많은 월급쟁이 동료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는 미안함을 마음 한 쪽 구석에 가지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민재는 늘 가던 아래층 계단을 통하는 문을 지나쳐서 원래 민재의 층에 연결된 엘리베이터 통로문으로 나왔다.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늘 다니던 아래층 출입문을 지나쳤다. 민재가 평소 일부러 한층을 계단으로 내려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코로나 19 때문에 회사가 사람들의 동선 분산을 위해 층별로 엘리베이터 운행을 분리를 하고 나서 민재가 있는 층은 위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퇴근 시간에 제때 엘리베이터를 잡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민재가 한 층을 계단으로 걸어내려가면 그 아래층은 그 구간에 가장 높은 층이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잡기가 훨씬 수월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같은 층의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퇴근 시간에 민재 회사의 중역들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에게 ‘일찍 퇴근하네’, ‘요새 한가한가 봐’ 하는 인사를 듣는 것이 부담되었다. 물론 농담도 섞여 있었지만 어쩌다 한번 정시퇴근을 하더라도 그때 한번 마주친 것 때문에 한가한 사람으로 농담을 듣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오늘은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이런저런 고민 덕에 무심결에 계단 출입문을 지나쳤다. 민재는 순간 왔던 길을 되돌아가 계단으로 갈까 했으나 오늘은 중역들을 마주치지 않겠지 하는 마음에 그대로 민재가 있던 층의 엘리베이터 통로로 나갔다. 나오기 전에 주변 자리들을 보았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임원들이 일찍 자리를 비운 것 같았고 그래서 그런지 그 임원들 바로 밑의 상사들도 일찍 퇴근들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통로문을 여는데 저쪽 끝쪽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타는 모습이 보였다. 민재도 뛰어가 버튼을 누르면 그 여자가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전 문을 다시 열고 탈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기는 싫었다. 이전에도 민재 자신이 탄 엘리베이터가 문이 닫히고 내려가려 가기 직전에 누군가 버튼을 눌러 닫히고 있는 문을 억지로 열어 타면 그 사람이 곱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엘리베이터를 내려보내고 내림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옆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소리와 함께 램프와 깜박였다.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안 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민재는 모두 그냥 내려가는 사람들이구나 생각을 하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 타고나서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재가 있는 곳 본부장의 목소리였다. 민재는 예상치 못했던 본부장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엘리베이터에는 본부장과 민재가 속한 부서의 임원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아마 같이들 회의를 참석하고 오는 길이었는데 본부장이 다른 임원들에게 무슨 얘기를 하느라고 엘리베이터에서 안 내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필이면 이렇게 본부장과 모든 임원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다니 민재는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민재는 몸을 구석으로 하여 먼저 본부장이 내리게끔 하였다. 누군가 민재의 등을 툭툭 쳤다. 민재 옆 파티션 자리에 있는 팀의 팀장인 전무였다. 그 전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툭툭 민재의 어깨를 치는 두 번 내리치는 것이 마치 ’ 나는 아직도 일하는데 너는 퇴근하는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민재는 사무실 빌딩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민재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조금 전 엘리베이터 속의 일이 가득했다.

‘하필이면 오늘 그 엘리베이터를 타서 그 임원들을 다 만나냐. 젠장..’

민재는 매일과 달리 계단으로 한층 안 내려가고 탄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있었지만 사실 본부장과 임원들의 머릿속에는 민재를 마주친 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별것도 아닌 그 일을 계속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지구 상에서 민재 하나 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민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버스를 타고 집이 있던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민재의 머릿속을 돌고 있었다.

민재는 버스에서 내렸다. 3월이긴 하지만 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민재는 쌀쌀하던 따뜻하던 날씨와 상관없이 금요일이라 들뜨고 싶었지만 자연스럽게 들떠지지 않고 억지로 들뜨려고 애쓰는 자신의 모습에 기분은 아이러니하게 더 가라앉고 있는 것을 느꼈다. 민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의 기분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할지 몰랐고 느껴보지 못한 이런 기분이 계속 드는 현실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멀지 않은 곳에 편의점이 보였다. 집에 가기 전에 맥주 한 캔과 라면이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그냥 집에 들어가면 비참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민재 자신에 비해 한참 어려 보이는 여자가 민재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 밝고 친절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민재는 편의점에서 일을 하는 어린 여성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소리를 내어 ‘네’라고 말할까 하다가 마스크를 쓴 채로 큰 소리를 내어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싶어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받았다는 제스처를 보여주고 식품이 진열된 코너로 바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맥주가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를 보았다. 냉장고 한 열이 전부 맥주였다. 갑자기 맥주라면 3가지 종류밖에 없었던 시대가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맥주, 수입 맥주, 수제 맥주 등등 언뜻 봐도 스무 종류가 넘는 맥주 속에서 무엇을 마실지 고민이 되었다. 한 2~3분 냉장고를 보고 서 있었을까 한주에 하나씩 20주 정도면 다섯 달 동안 한 종류씩 마셔보면 되지 뭘 고민을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하고 나서 두 번째 줄의 레트로틱한 디자인이 된 곰 그림이 있는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라면 코너로 가서 제일 매워 보이는 컵라면 하나를 골라 계산대로 갔다.

계산을 하고 테이블로 가서 라면을 뜯어 뜨거운 물을 부어놓고 맥주 캔을 땄다. 그러다 아까 그 젊은 여자가 민재에게 말을 했다

“저 고객님, 매장 내에서는 맥주 드실 수 없어요”
“아 그래요? 몰랐네. 알았어요”

주류는 편의점 내에서 마실 수 없다는 것을 민재는 알지 못했다. 순간 맥주는 땄는데 마실 수 없으니 어떡해 하나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민재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을 열고 편의점 바깥으로 나갔다. 어차피 라면이 익을 때까지 몇 분이 걸릴 테니 그동안 밖에서 맥주를 다 마시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바깥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캔을 들어 맥주를 마시는데 길 건너편에 보이는 높은 건물들의 불빛이 민재의 눈으로 들어왔다. 그 불빛들을 보니 왠지 민재는 입속에 머금은 맥주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불빛이면 따뜻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민재의 기분 때문인지 거꾸로 더 차갑고 춥게 느껴졌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민재는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와 라면을 먹었다. 평소에 다이어트 때문에 먹지 않는 맥주+라면 조합을 금요일이라 오랜만에 먹어서 맛있을 법도 한데 왠지 맛있게 느껴지기보다는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고 그냥 집으로 가서 더 기분이 비참해지는 것보다는 이걸로 배라도 어느 정도 부르게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어 나머지 라면도 후룩후룩하며 씹어 먹었다.

민재는 밖으로 나와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까지 1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걸으면서 민재는 최대한 늦게 집에 도착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지금 민재 자신이 할 수 있는 불금을 위한 모든 것은 다 했는데 집에 도착해서 여전히 공허하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꼭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도 친구들을 불러서 왁자지껄하게 술을 먹거나 노래방을 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민재는 이미 그런 시간 이후에 밀려오는 공허함이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40대 중반의 나이었다. 멀리 사거리 즈음 민재의 아파트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퇴근길 1시간 30분 남짓한 오늘 민재의 불금은 비록 다른 이들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도 상관없었다. 민재는 그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민재는 현관문을 열었을 때 자신이 어떤 기분이 될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냥 걷고 그냥 문을 열고 그냥 내일 또 일어나기로 했다.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숨을 쉬고 또 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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