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는 회사에서 업무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캐나다에 있는 거래선에게 2분기 가격 관련 가이드 메일만 써서 보내면 오늘 하루도 그럭저럭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문단을 쓰고 있을 때 갑자기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집어 열어보니 큰 딸이었다. 웬일인가 싶었다. 사춘기 딸에게 문자를 받는 건 대통령 표창을 받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빠, 오늘 호두과자가 너무 먹고 싶은데 이따 학원 끝나고 나 데리러 올 때 같이 가서 사면 안 될까?’ ‘오, 그래 알았어. 이따가 같이 가보자’ 메시지를 보낸 이유가 아빠인들 어떻고 호두과자인들 어떠하리. 그저 딸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행복하고 딸이 무언가 필요할 때 아빠를 찾는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민재는 생각했다. 민재는 곧 메일을 마무리하고 회사를 나섰다. 건물을 나서는데 휘잉 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늘부터 갑자기 한파가 몰아친다더니 정말 춥구나 으구’ 민재는 목까지 패딩 단추를 잠그고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던 민재는 문득 호두과자 가게가 10시까지 문을 안 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열어 지도로 찾아보니 두 번째로 가까운 호두과자 가게는 10시에 문을 닫았고 가장 가까운 가게는 ‘영업시간 확인’이라고만 나와있고 상세 시간은 없었다. ‘하긴 10시에 학원에서 픽업하는데 10시에 가게를 닫으니 미리 사다 두는 것이 낫겠다’ 민재는 머릿속에 호두과자를 내밀었을 때 웃으면서 반가워할 큰 딸의 얼굴이 상상되었다. 민재도 저절로 웃음이 머금어졌다. 민재는 가장 가까운 호두과자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아직 9시 전이니 아직 까지는 문을 닫지 않았을 것 같았다. “또르르르. 덜컥. 여보세요 아이아이 호둡니다” “아네, 호두과자 좀 사러 가려고 하는데요 오늘 몇 시까지 영업하시나요?” “아 저희 좀 들쭉날쭉 한데 9시 30분에서 필요하면 10시까지도 엽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10시 전까지는 들리겠습니다.” “아 저 여보세요? 얼마나 구입하실 건가요? 대량 구매하시는 건가요?” “아니오. 가장 적은 게 얼마죠?” “3,000원입니다.” “네 3,000만 살게요.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 네.. 그러면 아마 그전에 다 팔리고 없을 것 같은데요. 3,000원만 사시는 거면” 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가 약간 떨떠름한 것 같았다. 내가 많이 살 줄 알았다가 3,000원짜리만 산다는 걸 알고 약간 김이 샜는지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변하였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보면 호두과자 많은 개수를 사는 사람보다 적은 개수를 사는 사람이 더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많이 산다고 하면 호두과자를 더 만들고 손님을 잡기 위해 홀드를 해주겠지만 어쨌든 수학적으로는 모순된다고 민재는 생각했다. “음. 그러면 1 봉지만 좀 홀드해 주시죠. 지금 바로 가면 8시 40분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빨리 오세요~” 호두과자 가게의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민재는 속으로 내가 먹는 거였으면 안 샀을 테지만 딸이 먹고 싶다는 거니까 참고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딸을 학원에서 픽업하려고 9시 50분쯤 차를 운전해서 나갈 때 잠깐 들리면 되는 위치지만 호두과자 개수가 작다고 문을 닫을 것처럼 얘기하니 날씨가 춥고 바람이 세도 집에 가는 길에 조금 돌아서 들려야겠다고 민재는 생각했다. 갑자기 민재는 호두과자 가게의 남자가 자신과 같은 직장인이었다가 창업을 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목소리가 날카롭고 약간의 짜증이 담긴 목소리는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페이퍼 워크로 시달리는 민재 자신의 동료들의 목소리와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민재는 문득 30대 초반에 사업을 한답시고 좌충우돌했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러자 호두과자 가게 남자의 불친절함도 그냥 물에 풀린 설탕처럼 사라졌다. 민재는 호두과자를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바람이 너무 강해서 호두과자 봉지보다 먼저 민재가 날아갈 뻔할 정도였다. 여러 모로 호두과자를 걸어가서 사기에는 좋은 날은 아니었다. 민재는 딸의 학원이 끝나기 5분 전쯤 호두과자 봉지에서 두 알을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따뜻한 호두과자를 가져다주고 싶었다. 전자레인지보다 에어프라이어 넣었으면 겉이 좀 더 바삭했겠지만 그러면 너무 오래 걸릴 수 있어 우선 전자레인지에 만족했다. 두 알을 꺼낸 봉지를 보니 8~9알 정도 있는 것 같았다. 민재는 남은 호두과자는 집에 돌아오면 꼭 에어프라이어에 넣어 바삭하게 먹으라고 말을 해주리라 생각했다. 얼마 안 있어 딸에게 전화가 왔고 민재는 따뜻한 호두과자 두 알을 락앤락에 넣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타서 락앤락 뚜껑을 열었다. 그냥 닫아두면 축축해져서 왠지 딸이 맛이 없게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민재는 조수석에 호두과자가 든 락앤락을 잘 내려두고 학원으로 출발했다. 민재의 차는 곧 딸의 학원 앞에 도착했다. 언뜻 보니 학원 앞에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민재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 딸. 에게 전화해” “큰딸에게 전화를 겁니다~” 차량 시스템이 블루투스로 민재의 폰을 연결하여 곧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데 바로 앞 학원 정문에서 친구 3명과 나오는 큰 딸의 모습이 보였다. 민재는 천천히 차를 멈추고 딸이 차를 탈 수 있도록 도어 잠금장치를 열었다. 잠금장치를 풀고 앞을 보자 딸이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조수석 쪽으로 오고 있었다. 딸이 인사를 하는 친구들을 쳐다보니 남학생 1명과 여학생 2명이었다. 갑자기 딸의 친구 3명이 나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하였다. 밤이기도 하고 운전석 창에는 선탠이 되어 있어 내가 보이지 않을 텐데도 꽤 허리를 많이 숙이면서 인사를 하였다. 그중 남학생 1명과 여학생 1명이 인사를 하고 나서 다시 두 번째로 허리를 굽혔다. 민재는 창문을 열어 인사를 받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민재가 인사를 받지 않아서 두 번이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것이라 생각했다. 버튼을 눌러 창문을 열려던 순간 조수석 문이 열리고 딸이 차에 탔고 그와 동시에 뒤에서 다른 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민재는 순간 창문을 열던 손을 멈칫하고 잠시 얼음 상태가 되었지만 뒤차가 경적을 울리기 전에 차를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재는 창문을 열려던 손을 다시 핸들에 놓고 액셀을 밟아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빠~ 맛있는 냄새난다” “응 이거 호두과자. 호두과자 가게가 10시까지는 안 열어서 미리 가서 샀어. 그리고 따뜻하게 줄려고 일부러 데웠다. 이건 급하게 데우느라 전자레인지에 데운 건데 집에 가면 에어프라이에 데워먹어. 그럼 겉이 더 바삭해서 맛있을 거야.” “땡큐~. 이것도 맛있다 꺄아~” “ㅎㅎ 그래 맛있게 먹어. 그런데 아까 인사하던 친구들 그때 말한 쌍둥인가? 인사성이 밝더라” “응 맞아. 남자 여자 쌍둥이.” “어떻게 하다 보니 인사를 못 받아줬네. 내일모레 만나면 인사 잘해서 착하다고 전해줘.” “오케이~” 민재의 딸은 호두과자를 정신없이 먹었다. 민재는 추운 날씨에 이렇게 차 안에 있을 수 있는 것과 인사성이 밝은 딸의 친구들 그리고 민재가 데운 따뜻한 호두과자를 맛있게 먹는 딸의 모습에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민재는 내일도 다시 오늘처럼 행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열심히 더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