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는 생각에 잠겨 회사 건물 앞 공원 길을 걷고 있었다. 어제는 낮부터 눈이 많이 왔었는데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그냥 똑바로 앞으로 보며 걷는데도 햇살 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눈을 완전히 뜨지 못할 정도로 밝은 해 때문에 민재는 가늘게 실눈을 뜬 채로 고개를 들었다. 민재는 문득 점심 먹으면서 본 학폭 관련 뉴스가 떠올랐다. ‘국민학교 4학년 아니면 5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무슨 혁이었던 것 같은데. 성은 박 씨였던 것 같고’ 민재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과 크게 싸웠던 한 남자아이가 생각이 났다. 요새 말로 그 아이는 전체 학년의 ‘짱’ 혹은 ‘통’이라고 불리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같은 반에 있는 것은 득일 수도 실일 수도 있는 일이다. 민재는 반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민재에게 항상 ‘예외’를 요구했다. 아마 그 ‘예외’가 짱에 대한 대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민재도 융통성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적당히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그 끝 이름이 ‘혁’이라고 기억되는 아이를 봐주었던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혁은 반장이면서 자기보다 훨씬 덩치가 큰 민재의 그런 제스처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던 것인지 민재에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다. 그런 흥미로운 균형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민재가 아침에 학교에 와서 반으로 올라가려는데 교무실 창문 너머로 처음 보는 여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는 말총머리를 하고 옷도 무척 깔끔하고 밝은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민재의 담임 선생님 책상 옆에 서 있었다. 민재는 머릿속으로 우리 반일까 아닐까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자,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왔어요. 영은아 인사해야지” 아침에 본 그 여자아이는 정말 전학생이었다. 민재는 괜히 그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뭐라 뭐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 같았는데 민재의 귀에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반장이 당분간은 학교 시설 위치 같은 것도 좀 알려주고 해라. 알겠지?” “네, 선생님” 민재는 되도록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시작된 수업시간 내내 민재의 옆 분단, 앞으로 세 번째에 앉은 그 아이의 뒷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자 1교시는 이상. 반장은 오늘까지 내기로 한 위문편지 걷어서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 놀 것.” “네. 차려 경례” “감사합니다” 쉬는 시간이 되었는데 민재는 머리가 멍했다. 머리가 텅 비어있는 것 같았다. 1 분단장이었던 영석이가 어깨를 툭 쳤다. “여기 우리 분단 거.” “응? 뭐?” “위문편지. 선생님이 말한 거” “아 그래. 맞다. 고마워” “너 어디 아프냐 얼굴이 이상한데?” “아니야 배가 좀 아파서. 괜찮아” 분단장을 하는 아이들이 위문편지를 바로 걷어다 주었다. 민재는 장수가 맞는지 편지들을 세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 무언가 환한 느낌이 들었다. “저.. 반장... 나는 어떻게 해?” 민재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오늘 전학 온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응? 뭘? 나? 어떻게 하냐고?” 민재는 횡설수설했다. 목소리에 흥분이 가득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민재는 알지 못한 것 같았다. “위문편지 말이야. 나는 못 썼는데. 어떻게 해야 해?” “아 맞아.. 위문편지.. 내가 선생님에게 여쭈어 볼게.” 민재는 짧게 말하고 고개를 숙여 다시 편지를 세었다. 아니 세는 척을 하였다. “응, 알았어.” 그 아이는 약간 무안했던지 바로 자리로 돌아갔다. “야 그깟 편지 쓰는 거 뭐 얼마나 어렵다고 내가 써줄까?” 약간 껄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혁자로 끝나는 이름의 짱 목소리였다. 전학 온 영은이는 당황한 듯 아무 말고 못하고 두 세발자국 주춤주춤 뒷걸음치며 혁이를 쳐다보았다. “편지 금방 쓰잖아. 내가 써줄까? 써달라고 하면 써주고?” “응... 어...” 영은이는 바로 답을 못하였다. 혁이는 그런 영은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광경이 민재의 눈에 매우 불편하게 들어왔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민재는 생각했다. 민재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빨리 나서라 그녀를 구해라 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내가 선생님께 물어본다고 했잖아. 써주긴 뭘 써줘!” 민재는 소리쳤다. 민재는 자기 목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다. 혁이와 영은이도 큰 소리에 놀란 듯 민재를 쳐다보고 반에서 쉬는 시간을 각자 보내고 있던 아이들도 정지영상처럼 민재를 쳐다보았다. “아이씨 깜짝이야. 이 새끼는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혁이는 갑자기 욕설을 하며 민재의 멱살을 잡아챘다. 민재는 혁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혁이가 싸우는 모습을 민재가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지만 싸움은 키나 덩치로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 이 자식이!” 민재는 멱살을 잡힌 자신의 모습을 은영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 너무 싫었다. 민재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오른 주먹으로 혁이의 배를 있는 힘껏 강타했다. “억~” 혁이는 비명을 지르면서 배를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고통스러운 듯 얼굴은 무척 일그러져 있었고 한동안 자리에 주저앉아 움직이지 못했다. 민재는 100미터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오른 주먹은 불끈 쥐고 있었고 온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민재의 머릿속은 하얀 백지 같았고 주변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새끼가!” 어느새 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을 하면서 민재를 노려보았다. 민재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얼음조각처럼 자리에 서 있었다. 순간 혁이는 몸을 돌려 주먹으로 민재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때렸다. '쿵... 삐...’ 민재의 눈 앞은 순간 번쩍했다. 민재의 몸은 잠시 휘청하였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너 반장이라고 안 봐줘. 두고 보자 새꺄!” 혁이는 여전히 배가 아픈지 왼손으로는 배를 움켜쥐고 교실 뒷문으로 주춤 거리며 나갔다. 민재가 혁이에게 맞은 오른쪽 관자놀이를 만져보니 탁구공 반만 한 정도 크기로 혹처럼 무언가 부어올랐다. ‘키는 나보다 작은 게 주먹은 짱 소리 들을 정도는 되나 보네’ 민재는 부어오른 곳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그 날 이후 한동안 민재와 혁이는 만나면 서로 잠시 노려보았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소문을 들으니 혁이는 여전히 반 아이들 혹은 같은 학년 아이들에게 돈을 뜯거나 돈을 주지 않으면 때리기도 하는 것 같았으나 민재가 앞에 있을 때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재도 혁이가 앞에 있을 때는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최소한 할 것만 하면서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웬일인지 민재와 영은이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그 날 이후 민재는 이상하게도 영은이를 처음 본 날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딩동댕동~ 인사팀에서 알려드립니다.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 회사 방송이 민재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어느새 점심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민재는 사무실이 있는 빌딩으로 발길을 돌리며 어릴 적 혁이와의 기억이 요즘 뉴스에 나오는 '학폭 이슈 정도로 커지지 않았음에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휴우... 내 얼굴에 혹이 사라진 것 처럼 혁이 그 녀석 배도 이제 아무 통증이 없겠구나.” 민재는 갑자기 곧 있을 회의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회사 엘리베이터가 있는 입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