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띵, 띵띵” ‘아차차, 신규 배달 수신 끄는 걸 깜박했군’ 내음 씨는 오른쪽 주머니로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원래 배달 한 개가 지정되면 배달 완료될 때까지 추가로 신규 배달 알림이 들어오는 걸 차단해 놓는데 깜박한 모양이다. 잘하는 사람들은 2~3개까지도 한꺼번에 배달한다는데 내음 씨는 한 개만 배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알람이 여러 번 울리는 게 정신 사납기도 했지만 왠지 새로운 주문을 받으면 한 손에 두 개를 들고 가야 해서(다른 한 손은 계속 휴대폰으로 체크를 해야 하므로) 음식이 흔들려 섞이고 망가질 수 있을 것 같아 받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 이상하네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안 눌러졌나?’ 내음 씨는 휴대폰에서 지금 가고 있던 닭갈비 집의 위치가 다시 깜빡이자 엄지로 다시 누르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버튼을 누르자 배달할 집의 위치에서 다시 화살표가 그려지면서 또 하나의 위치가 지도에 표시되었다. 그러면서 배달 건수 숫자가 1개가 아니고 2개로 표시되었다. 내음 씨는 처음 보는 광경에 약간 당황했다. 그리고 안내센터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오작동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챗으로 안내센터에 문의를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식당 도착까지 약 8분이 남았다. 식당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고객 센터에서 톡이 왔다. 오작동이 아니고 AI가 같은 식당에서 배달요청이 온 주문이 도착지가 서로 멀지 않아 이렇게 2건이 배달 배정이 된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AI 던 뭐든 난 1개만 잘 배달하려고 했는데... 이런 덴장 덴장. 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이라 인간미가 없구나. 쩝..’ 내음 씨는 식당에 가서 2개의 음식을 픽업하고 일단 한 손에 하나씩 들었다. 휴대폰을 볼 때야 잠시 한 손에 2개를 겹쳐 들 수밖에 없지만 최대한 한 손에 하나씩 들어보려고 노력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배 달지는 무슨 회사 빌딩인 것 같았다. 언주로 1127 4층이라고만 쓰여있었다. ‘어? 뭐지 잠겨있네’ 목적지 빌딩에 도착한 내음 씨는 문을 밀었으나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럴 경우에는 주문한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 수밖에 없다. 휴대폰을 꺼내어 ‘고객에게 전화연결 버튼’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여?” 뒤에서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하얀색 뉴욕 양키즈 모자를 쓴 노인이 멀뚱히 내음 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네, 배달인데요. 문이 잠겨 있어서요” “어 그려? 손에 짐도 많고 내가 관리인이라 문을 열어주고 싶은데, 괜히 열어주고 여기 사람들한테 욕먹을 수가 있어서. 전화햐, 전화.” “아.. 네 괜찮습니다. 전화할게요.” 문을 열어주면 한 3~4분은 단축될 텐데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도착 시간 1분 초과 알람이 떠 있어서 마음이 급했는데 그냥 오늘은 운이 별로 안 좋은 날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드는데 갑자기 따뜻한 꿀차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응? 이 냄새 얼마 전에 맡은 그 냄새인 것 같은데...?’ 그리고 갑자기 쌩하고 미친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내음 씨는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독재타도! 독재정권 물러가라 물러가라!” 내음 씨는 갑자기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앞에 보이는 운동장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갑자기 내음 씨의 등 뒤에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내음 씨는 어리둥절하여 회전문같이 좌우로 나오는 학생들 틈에서 몸을 뱅그르르 돌렸다. ‘뭐야 이거. 여긴 어디야’ 내음 씨는 정말 뭐가 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착시간 초과 알람이 울렸던 것을 생각하며 일단 건물의 4층으로 가보기로 했다. 계단을 따라 4층에 올라가자 청자켓 청바지에 뿔테 안경을 쓴 절은 남자가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 저기... 배달... 왔는데요” “배달이요? 무슨 매달이요?” 뿔테 안경을 낀 그 남자는 이상하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이거 뭐에요? 어디서 나셨어요?” 그 남자는 내음 씨 왼 손에 든 비닐백에 손을 뻗었다. 그 남자는 비닐백에서 점퍼 하나를 꺼냈다. 검은 가죽점퍼에는 하얀색으로 FREE라는 글자와 JH라는 이니셜이 쓰여 있었다. 점퍼를 손에 든 남자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이거 지혜가 입던 옷인데... 나쁜 계집애 좀 유명해졌다고 연락도 안 되고 퉤” 남자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지혜한테 이거 좀 갔다 주세요. 이딴 거 이제 필요 없다고” 남자는 내음 씨에게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내밀었다. 테이프 안 종이 커버에는 FREE 2라고 적혀 있었다. 남자는 내음 씨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가 사라졌다. “띵띵띵띵” 내음 씨의 휴대폰 알람이 다시 울렸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첫 번째 배달은 완료되었고 두 번째 배달 지점까지 7분이 남았다는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이거’ 내음 씨는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배달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시 휴대폰을 보고 두 번째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건물에서 나와 옆에 있던 문을 통과하자 언덕길이 나왔다. ‘이런 5분밖에 안 남았는데 언덕길이라니’ 내음 씨는 오늘 참 운이 여러 가지로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언덕에 올라가자 커다란 2층 집이 보였다. 휴대폰 지도를 보니 두 번째 목적지가 틀림없었다. 집 앞으로 다가가자 번쩍 하고 자동차 전조등이 내음 씨를 비추었다. 내음 씨는 순간 움찔하며 뒤로 두세 걸음 물러났다. 그 앞으로 커다란 검은색 승용차가 멈추었다. “지혜야, 두 시간 정도 시간 있으니까 좀 쉬었다가 나와”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조수석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곧이어 뒷자리에서 한 여자가 내렸다. 뒷자리에서 내린 여자는 하얀 피부에 무척 피곤한 얼굴이었다. “아저씨, 누구세요?” 내음 씨는 순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조수석에서 내린 선글라스 낀 남자가 내음 씨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네, 저 이거... 배달 왔는데요” “배달이요? 무슨 배달이요?” 선글라스 낀 남자는 내음 씨에게 비닐백을 받아 안에 든 것을 보려고 비닐백을 열었다. 그 안에는 카세트테이프가 수십 개 들어 있었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 가수 지망생이세요? 그렇다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와서 이러면 안 되지” 선글라스의 사내는 비닐백을 바닥에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프 몇 개가 비닐백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중 한 개의 테이프가 뒷좌석에 내린 창백한 얼굴의 남자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 남자는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테이프를 땅에서 짚어 들었다. FREE 2라고 적힌 테이프 아까 뿔테 안경의 남자가 내음 씨에게 전해준 테이프였다. “이거 어디셔 나셨어요? 누가 주던가요 정우를 아세요?” 창백한 얼굴의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음 씨에게 말을 걸었다. 지혜와 정우는 2년 전 음악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둘 다 동아리를 찼던 중 우연히 한 동아리에서 만나 친한 친구가 되었다. 둘 다 가수가 되겠다고 밤낮으로 합주하고 노래 연습을 하던 중 대학 가요제에 나간 민성이 대상을 타게 되었다. 민성은 곧 유명세를 타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으나 정우는 그런 민성에게 왠지 연락하기가 꺼려졌다. FREE 2 테이프, 민성이 유명 가수가 되기 전 정우와 같이 연주를 하면서 녹음한 테이프였다. 내음 씨는 창백한 얼굴의 민성이라는 사내에게 정우라는 뿔테 안경 사내를 조금 전 대학교 건물에서 만난 것을 얘기해 주었다. 민성은 차를 타면서 선글라스를 낀 매니저인듯한 남자에게 정우가 있었다는 건물로 빨리 가자고 하였다. 그렇게 그 자동차는 내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음은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시간 초과가 될 것이 두려워 허겁지겁 휴대폰을 꺼내어 제대로 시간 확인도 못하고 배달완료 버튼을 눌렀다. 따뜻한 꿀차 냄새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었다. “뭐혀 여기서 아직 안 끝난겨?” 양키즈 야구모자를 쓴 노인이 눈을 뜬 내음 씨 앞에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아 아니오. 끝났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추운데 얼른 집에 가 내일 또 해야지. 얼른가 얼른. 나도 추워서 들어가야 혀” “네? 내일이요? 아네.. 수고하세요” 내음 씨는 쫓겨나듯 노인의 손짓에 건물 입구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민성의 뒤로 주차장에서 나온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노인의 앞에서 멈췄다. 창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추운데 고생 많으시네요. 얼른 들어가세요” “아이고 사장님, 아이고 옆에 강 선생님도 계셨네요. 보기 좋네요 두 분 항상 ㅎㅎㅎ” “선생님 안녕하시죠, 이 친구가 굳이 태워다 준다고 해서 또 같이 나왔네요.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요 사귀는 줄 알고 ㅎㅎㅎ” “야 지혜야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사귀긴 누가 사귀어. 소속사 대표가 아티스트 챙기는 건데 쓸데없는 소리 하기는... 내려. 걸어가 나 혼자 갈 거야” “알았어 알았어. 농담도 못하니 예나 지금이나 까칠한 건 참 내. 얼른 가. 수고하세요 선생님~ “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야구모자 노인을 뒤로 한채 경쾌하게 다른 차들 속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