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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1. 토요일 오후

by 심내음

“자기야 음식물 쓰레기 좀 버려줘”
"어.. 으응. 알았어. 주방 발코니에 있는 거 버리면 되지?”

민재는 소파에 앉아서 멍을 때리고 있다가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설날 연휴 때문에 제법 긴 휴일이지만 코로나 덕에 아무 곳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 어제와 같은 그리고 내일과도 아마 같을 오후를 보내고 있다.

두 딸이 중학생이 되고 경제적으로 씀씀이가 점점 더 늘어나면서 민재는 주말에 특별한 계획을 세우기가 부담스러웠다. 아니 사실 경제적인 이유를 대기 전에 애초부터 민재는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을 두고 혼자만의 취미를 가진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미안했다. 그래서 취미라고 할 수 있는 건 그냥 TV를 보는 것이 유일했다. 돈도 안 들고 만약 가족 중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바로 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녀올게~...”

민재는 마스크를 쓰고 한 손으로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한 손으로는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쌀쌀한 기운이 확 얼굴과 몸으로 덮쳐왔다. 집에서 제일 두꺼운 패딩을 입었지만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 패딩은 작년에 아내의 권유로 오랜만에 민재 자신을 위해 산 것인데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롱 패딩은 운동선수들이나 입는 거라고 민재는 생각했지만 마흔이 넘고 사십 대 중반이 되자 언제부턴가 민재는 다리가 몹시 추웠다. 한 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았던 때는 정말 오래전이고 지금은 다리가 추워서 롱 패딩이 없으면 나갈 수가 없는 것이 민재의 현실이었다.

"끼익.. 쿵”

민재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한 겹더 싼 비닐을 음식물 쓰레기 옆에 있는 작은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사실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에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만 버리게 되어 있는데 귀찮아서인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덧싼 다른 비닐과 그냥 버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민재도 ‘나도 그냥 버릴까’ 하고 고민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냥 버린 적은 없었다. 이런 것 까지 귀찮아하면 앞으로 점점 식물처럼 변할 것 같았고 나중에 귀찮은 마음이 온 마음과 정신을 덮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민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잘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사람이 되기는 더 싫었다. 그래서 이렇게 언제 무엇을 하더라도 귀찮은 마음에 할까 말까 망설이게 되면 무조건 마음과 반대로 하자라고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놓았다. 누가 보면 쓰레기 버리는 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을 하냐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민재의 의식이고 그 의식의 흐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민재는 내일 출근할 옷을 고르러 둘째 딸의 방으로 갔다. 민재의 집에는 방이 3개이고 별도 드레스 룸은 없다. 큰 딸의 방에는 온 가족의 책이 같이 있는 책장들이 있고 둘째 딸의 방에는 온 가족의 옷이 다 있는 옷장이 있다. 그리고 안방에는 옷도 약간 있고 그 외 생활용품들이 있었다. 각자의 방에 각자의 옷과 물건들이 있는 게 맞겠지만 민재는 현재의 집에서 그런 구조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불평을 하지 않는 두 딸들이 문득 고맙게 느껴졌다.

민재는 옷장에서 셔츠 1개와 바지 1개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거실로 와서 거실에 있는 가족 공용 옷걸이 맨 뒤에 걸어 놓았다. 아침 6시에 회사로 출근하는 민재는 그 시간에 자고 있는 둘째의 잠을 방해하기 싫었다. 그래서 늘 하루 전 오후에 내일 입을 옷을 꺼내어 거실에 미리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옷을 미리 골라 놓으면 아침에 옷을 고르는 시간을 1분이라도 아껴서 더 잘 수 있는 것도 민재가 이렇게 미리 옷을 가져다 놓는 이유였다.

민재는 소파에 잠시 눕기 위해 소파 위에 있는 인형과 책, 옷을 잠시 옆으로 치워 놓았다. 소파에 물건들이 놓여 있으면 앉을 때 치우는 게 귀찮아서 소파로서의 구실을 못하게 된다고 가족들에게 여러 번 말을 했지만 아내와 두 딸은 그 습관을 고치는 게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습관을 고치는 것보다 그냥 민재 스스로가 조금 더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처럼 귀찮다고 생각이 들 때 스스로를 움직이는 것이 민재의 규칙이었으므로 민재는 이재 가족들에게 물건들을 소파 위에 놓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민재가 움직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민재는 갑자기 오래된 이 소파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오래되었구나 이 소파도. 새로 소파를 하나 살까?.... 아냐 새로 소파를 사더라도 지금처럼 소파보다 물건을 놓는 선반 같은 역할을 할 테니 그냥 망가질 때까지 계속 쓰자’

민재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래도 오늘은 햇볕에 많아서 따뜻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나서 옷을 갈아입지 않았기 때문에 누우려면 소파에 누워야 한다. 아이들 한테도 어릴 때부터 밖에서 입었던 옷을 입고 침대에는 눕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도 씻지 않고 누울 때는 거실 소파에 눕던가 만약 누군가가 소파에 있어 눕지 못할 경우에는 겉옷을 벗고 방에 있는 침대에 눕곤 했다. 그리고 민재는 올해 허리 수술을 받고 나서부터는 의사의 충고대로 되도록 앉지 않고 서 있거나 누워 있으려고 노력했다. 조금 오래 앉아 있을 때 척추에 박혀 있는 쇠붙이 핀이 느껴지고 통증이 생겨서 일할 때 빼고는 되도록 눕거나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

예전에는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면 민재는 거의 눕지 않았다. 왠지 잠을 자지 않고 누워 있으면 게으른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민재는 그 기분을 좋아하지 않았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민재는 부모님에게 부족한 환경을 받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넉넉하게 받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게을러진다는 느낌은 언제나 민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 2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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