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콩깍지가 씌었다고요?

4일 차 저녁 인천 공항에서

by 유영희

드디어 오키나와 공항에 도착했다. 하루 더 있었다면 숙소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니 집에 간다는 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풀가동할 수 있는 내 체력이 3박 4일이라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그러나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체력이 떨어질 것이니 3박 4일이 언제까지 내게 적정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작년 4월에 9박 10일 다녀온 취리히 여행도 5일째는 큰애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렸는데, 따지고 보면 그때는 5일은 버텼다는 얘기니, 이번에는 그것보다 약해졌기 때문이다.


왜 저렇게 아이들 캐릭터를 공항에 설치했는지 미스터리다.


점심을 못 먹었는데 기내식도 없으니 인천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래도 출출할 듯하여 김밥과 간식거리를 사서 대기실에서 흡입했다. 김과 밥을 펼쳐놓고 그 사이에 계란말이와 햄을 끼운 음식인데 편의점은 물론 오키나와 어디에 가도 흔하게 판다. 그래도 평화시장에서 먹은 그 김밥을 따라갈 김밥은 본 적이 없다. 특히 이번에 공항에서 먹은 김밥은 가장 부실했다. 그래도 딸과 즐겁게 한 입씩 나눠 먹었다.


오키나와 공항은 예상보다 붐벼서 화물 접수하는 데 상당히 오래 서서 기다렸다. 단순히 사람이 많아서라기보다 직원이 레일에 수하물 싣는 시스템이 아주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인원이면 인천공항에서는 순식간이었을 텐데 하다가 세계 3대 공항과 오키나와 공항을 비교하면 안 되지 하면서 그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딱 저녁 먹을 때쯤이라 저녁은 내가 사기로 했다. 오키나와 3박 4일 여행 동안 내가 든 돈은 공항버스 비용밖에 없다. 일본에서 밥이라도 한번 사야지 생각했으나 내 카드를 외국에서 써 본 적도 없고 내가 밥 산다고 작은애 내외 지출 규모에 무슨 큰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밥 사는 것을 접은 터다. 그래도 한국에 왔으니 맘 편하게 밥을 사기로 했다.


많은 사람이 인천공항에서 음식을 먹겠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 가족이 인천공항에 올 때는 언제나 큰애가 떠날 때였고, 그때마다 던킨에서 커피를 먹으며 송별식을 했다. 큰애는 역마살이 있는지 돈 있어서 유학 보낸 것도 아닌데 외국 생활을 많이 했다. 그때마다 온 가족이 인천공항에 가서 배웅을 했다. 뉴질랜드로 유학 갈 때는 어찌나 가슴이 찌르르하던지 그때가 가끔 생각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던킨도너츠가 아니라 밥을 먹게 된 것이다.


밥을 기다리는데 사위가 묻는다. 어디가 제일 좋으셨어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우리 사위는 적절한 시간에 참 적절한 질문을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 사위는 참 훌륭해 속으로 감탄했다. 사위는 수다스러운 편은 전혀 아닌데 내 집에 와서도 은근히 적절한 말을 잘한다. 이제는 대학에서 강의 안 하시는데 왜 논문을 쓰세요? 이번 직장은 출근할 때 구두를 신어야 해서 발이 너무 아파요. 다른 사람한테 사위 말을 전하며 너무나 적절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게 이구동성 사위한테 콩깍지가 씌었다고 한다. 작은애만 해도 논문 왜 쓰냐고 질문을 옆에서 듣고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걱정했다는 식이다. 남들에게는 걱정스러운 질문, 당연한 질문을 나는 아주 적절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니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구두 때문에 발이 아프다는 말만큼 편안한 대화가 있을까? 딸은 잠시 화장실에 가 있고 장모와 사위만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상황에서 참으로 적절한 대화가 아닌가? 논문 왜 쓰냐는 질문은, 한편으로는 솔직한 궁금증이었을 테고, 그것을 어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했다는 자체가 내 취향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내가 왜 논문을 쓰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내 말을 듣는 모든 이들의 반응은,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감동하느냐는 식이다.


어디가 가장 좋았느냐는 이번 질문도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내가 그런 질문을 좋아하고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밥을 기다리는 시간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다가 지난 3박 4일간의 여행을 마무리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멘트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오키나와라니'로 시작한 여행이 인천공항의 스몰토크로 멋지게 완성되었는데 어찌 적절하지 않을 수 있는가 말이다.



'세상에! 오키나와라니'라는 제목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내가 오키나와에 가볼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녀오고 보니, 여행 경비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에너지 소비를 생각하면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을 가도 되나 싶지만, 내 일상을 흔들지 않고 여행에 탐심 내지 않는 선에서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선에서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애들도 엄마가 스위스 다녀온 후로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다며 놀란다. 그렇게 오키나와는 추억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오키나와여, 굿바이!


덧. 기념품은 애들은 하나도 안 사고 나만 딱 하나 샀다. 오키나와 박물관에서 산 예쁜 손수건이다. 평소 손수건을 많이 쓰기도 하고 값도 많이 비싸지 않아서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샀다. 집에 와서 다시 펼쳐보니 박물관에서 봤을 때보다 더 예쁘다.



keyword
이전 09화박물관 맞은편에 파친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