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 오전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
3일 차 일정은 이상하게 머리에서 삭제되다시피 해서 기록을 봐야만 기억이 났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체력적으로 인지적으로 과부하가 걸려서 그랬던 것 같다. 자고 일어나니 좀 회복이 돼서 그런지 걸음걸이도 많이 호전되었다고 한다. 역시 피로가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한국 가는 비행기가 2시쯤이라 12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해서 오전에 짧게 갈 수 있는 곳으로 나들이를 갔다. 처음 일정을 짤 때부터 첫날에 가기로 계획했던 곳인데 시간이 애매해서 못 가고 마지막 날 가게 된 것이다. 숙소에서 도보로 20분 거리라 정말 가볍게 갈 수 있는 곳이었고 미술관과 박물관이 한 건물에 있어서 그 역시 다 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휙휙 봤다는 흉내만 내지는 말자 싶어 둘 중 하나만 가기로 했다.
선택 기준은 전시가 계속 바뀌는 곳, 그래서 인터넷으로 볼 수 없는 곳으로 정했다. 아무래도 박물관보다는 미술관이 더 시의성 있을 것 같았다. 첫날은 밤에 비가 꽤 왔고 일기 예보도 4일 내내 비 소식이 있었는데 다행히 둘째 날부터는 비가 많이 줄었고 마지막 날은 아주 화창해서 박물관까지 걷기가 아주 좋았다. 비 온 후라 하늘도 맑고 도로도 깨끗했다.
20분 정도 걸리는 곳인데 10분도 채 안 돼서 거리 풍경이 바뀌었다. 상가도 없고 전문학교니 소학교니 하는 학교들이 보였고 음식점도 거의 없이 정형외과나 치과 같은 간판만 보였다. 간간이 보이는 아파트는 신축은 아닌 것 같지만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새 건물처럼 보였다. 박물관 가까이 갈수록 숙소 근처 풍경과 점점 더 달라졌다. 알고 보니 여기를 신도심이라고 한단다. 건물들 규모가 거대하지는 않지만 정갈했고, 취리히의 건물만큼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약간의 품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박물관까지 가려면 육교를 건너야 했는데, 그 육교가 코우리 대교처럼 아치형으로 되어 있어서 부드럽고 우아해 보였다. 다리 폭도 넓어서 중간에 등나무 벤치처럼 생긴 쉼터도 있었는데, 보통 육교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이 전혀 없이 공원처럼 편안했다. 지나는 일본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아주 흔쾌히 응해주었다.
박물관 건물은 아주 독특했다.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 비슷하게 건물을 돌로 감쌌는데, 당연히 규모는 박수근미술관보다 훨씬 커서 입구를 찾기 어려웠다.
미술관과 박물관이 같이 있어서 그런지 밖에서 보면 상당히 큰 건물이지만 미술관 자체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2층에는 작가 한 명이 개인전을 했고 3층 올라가는 중간에는 설치미술 같은 조각이 몇 점 있었다.
2층 작가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화가라고 할 만한데 쓰여있기로는 그래픽디자이너라고 되어 있었다, 작품은 미군 부대에 대한 관심도 표현한 것을 보니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은 작가인 것 같다.
3층은 두 공간으로 분리되어 방 안에는 회화가 전시되어 있고 바깥쪽에는 흉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안내문을 보니 대충 오키나와 출신 작가들인 것 같았다. 촬영 금지라서 하나도 못 찍었다. 그래도 1층 굿즈 파는 곳에서 2층 작가의 도록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다.
1층을 다시 둘러보다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1층에는 사무 공간과 작은 전시실이 있는데 그 전시실에는 오키나와 주민과 학생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학생들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립 미술관에 일반인 작품을 전시하다니 인상 깊었다. 우리로 말하면, 시립미술관에 학생과 주민 같은 아마추어 작품을 전시한 적이 있을까? 앞으로도 그럴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가는 길은 박물관 정문 쪽이 아니어서 두리번거리며 입구를 찾았는데, 나올 때는 바로 정문으로 나와서 길 맞은편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JUMBO라는 큰 글씨 아래 가타가나를 보니 파친코와 슬롯이라는 글씨다.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박물관미술관과 오락실이 마주 보고 있다니, 재밌다.
돌아오는 길에 대만유학 클래스라는 간판이 눈에 또 들어온다. 가는 길에는 무심코 봤는데 이번에는 호기심이 생긴다. 영어 간판은 하나도 안 보이고 대만 유학 학원만 보이니 특이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대만으로 유학을 가나? 검색해 보니 비행기로 도쿄까지는 두 시간 반, 타이베이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알아볼 방법도 없고 열심히 알아볼 의욕도 없어서 간판만 눈에 담고 말았다. 점심을 먹기는 이르고 렌터카도 반납해야 해서 숙소를 정리하고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