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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Mar 06. 2019

헬베티카의 표정

내가 헬베티카 논쟁에 관심 가지기 시작한 건 동명의 영화 때문이었다. 게리 허스트윗 감독의 '헬베티카'는 서체 하나를 두고, 시각자료를 대하는 인간 심리 전반과 크게는 전 지구적 자본문제까지 연결시킨다. 영화가 2007년도에 나왔으니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갑자기 케케묵은 헬베티카 논쟁이 떠오른 이유가 뭘까.


영화 '헬베티카'의 포스터


헬베티카와 명료성

영화는 누구에 의해 서체가 탄생되었고, 헬베티카가 얼마나 위대한지 같은 뻔한 서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나오긴 하지만 영화 초반에 압축되어있다.) 오히려 서체를 둘러싼 찬/반 진영의 첨예한 의견 대립이 핵심에 가깝다. 두 진영 간 대립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함축되어있는데 서체 하나의 문제로 수렴되기에 각 덩어리가 매우 큰 편이다.

    서체는 탄생 시점인 1960년 독일 스템펠 사를 통해 '헬베티카'라는 이름을 최종 확정 지었다.(이전에는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시기는 디자이너 주관이 다량 들어간 시각적 스타일에 피로감이 일던 시점이었다.


디자이너 주관이 다량 들어간 시각적 스타일


구글에 '코카콜라 빈티지 포스터'를 검색해보면 위와 같은 시각적 스타일이 많이 검색된다. 일러스트레이션의 적극적 활용, 다양한 서체와 크기 등. 현재는 '뉴-레트로'라는 복고풍 스타일로 사랑받고 있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스타일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없었던 것 같다. 60년대 잡지의 광고면을 보면 모든 페이지들이 자기를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기분이 든다. 이러한 시각적 소음은 지면에 배치된 정보 계층구조(hierarchy)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닌 디자이너의 미감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개인적으로 헬베티카가 연 지평은 완성도만 높은 서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헬베티카가 다른 서체와 크게 다른 점은 등장과 함께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론이 같이 전파되었다는 점이다.(서체 스스로가 효과적 사용론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얼마 안 가 헬베티카의 효과적 사용론은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고, 이는 '스위스 모던 타이포 그래피 양식'이라 불렸다. 이 양식은 도상과 텍스트, 캡션 등 지면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그리드 시스템' + 중립적인 '산세리프 서체'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 모던 타이포 그래피 양식



헬베티카의 표정

헬베티카는 장식용 서체와 달리 담고 있는 내용 전달에 있어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세리프(획의 끝에 달린 장식용 꼬리, 가라몬드같은 서체가 대표적이다. 꼬리가 없는 고딕은 산세리프라고 부른다.)의 형태에 따른 감정 전달차에 손을 들고 싶다.


'Sad'를 헬베티카와 다른 폰트로 썼을 때의 감정 차이.


위 이미지에는 '슬픔'을 뜻하는 Sad가 두 가지 서체로 쓰여있다. 좌측은 '헬베티카'로 썼고 우측은 'Snell round hand'라는 손글씨 서체를 이용했다. 상대적으로 우측보다 헬베티카로 쓴 Sad를 보면 감정(기의)보다 '슬픔'이라는 글자 자체의 '기표'에 더 눈길이 간다. 이는 내가 저 감정의 영역에 개입할 여지가 더 높다는 말이 된다.(상상의 스펙트럼이 넓다.) 반면 우측 슬픔은 길게 뻗은 세리프 때문인지 우아한 감정선이 그어진다.(섬세함으로 가득 찬 사춘기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이 서체에서는 덤덤한 슬픔이나, 절망에 가득 찬 슬픔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헬베티카에는 이런 주관적 감정을 투영시키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괜히 타이포그래피를 빈 크리스털 잔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이 보일만큼 투명한 형식은 다양한 감정까지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헬베티카의 객관적 성격은 다국적 브랜드의 시각적 아이덴티티로 사용될 수 있는 커다란 근거가 되기도 한다.



헬베티카의 다국적성

무인양품, lufthansa, BMW, 노스페이스 같은 다국적 브랜드는 물론, 공문서나 사인시스템까지 헬베티카는 현대인의 생활에 공기처럼 떠다닌다. 이는 앞 서 말한 헬베티카의 객관적 성격 때문이다. 하지만 서체 성격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야기하기도 한다.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행동을 한 기업이 이미지 세탁을 위해 헬베티카를 사용한 로고로 다시 세상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직후에는 소음이 일겠지만, 서체가 만든 객관적 이미지는 시간이 갈수록 본질을 무디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많은 기업들이 정치적으로 편향된 이미지를 벗고 싶어 헬베티카를 선택하는 측면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다국적 기업이 선호하는 헬베티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동맹군 비행기 외관이 헬베티카로 레터링 되었다는 이야기가 영화에 잠시 등장한다. 이는 마치 세계의 객관적 입장이 미국이고 베트남은 악이라는 정치적 제스처를 시각적으로 단호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헬베티카의 이미지는 언제나 중립적이라기보다 그 시대 주류의 얼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데이비드 카슨으로 대변되는 해체주의 양식은 디자인 사전에 자주 언급될지언정 시대의 주류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양식은 헬베티카의 극단에 있다고 할 수 있다.(그리드 시스템의 해체, 핵심 뒤로 숨기기, 감정의 극단적 표현) 카슨이 만들어놓은 강렬한 이미지는 애써 주류에 편입되고 싶지 않은 비주류의 대변인에 가까운 것이었다. 반면 헬베티카를 사용하면,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단숨에 주류 씬에 착륙한 것 같은 착시를 준다. 어찌 보면 마법 같은 순간이다.



헬베티카의 호환성

오늘날을 대표하는 디자인 분야라면 Gui(Graphic user Interface) 영역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현대인의 아침은 휴대폰 알람의 인터페이스를 정지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된다.

    헬베티카(양식)가 등장한 당시에는 지면에 맞는 최적화된 레이아웃 하나만 있으면 됐다. 현재는 웹 - 모바일 - 태블릿같이 다양한 해상도의 디바이스에서 비주얼 콘텍스트가 끊기지 않도록 연결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즉, 하나의 완결된 지면 보다 유연한 레이아웃 운용이 훨씬 더 중요해진 시대가 온 것이다. 레이아웃의 유연함(웹의 와이드 한 해상도/가로폭이 좁은 모바일 해상도/태블릿 같은 다양한 해상도에서 콘텍스트를 흘리지 않고 대처할 수 있을만한)을 위해서는 단일한 지면과 구별되는 그리드 시스템이 필요하다. 편집 디자인의 그리드 시스템이 지면에 가장 적합한 모듈 형식을 찾는 것이라면, 디지털 그리드는 다양한 해상도에서도 유연한 대응을 위해 고정비가 아닌 ‘퍼센트’를 기준으로 한다.(모눈종이 같은 모듈 형식이 아닌 가로로 쭉 늘어선 칼럼 방식)

    앞서 '스위스 모던 타이포 그래피 양식'은 그리드 시스템과 산세리프 서체의 조합이라고 말한 바 있다. Gui디자인에 자주 사용되는 'roboto'같은 서체 역시 시대에 맞게 패치된 헬베티카 같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앞으로 디바이스는 더 세분화될 것이고 유연한 레이아웃의 요구는 거세질 것 같다. 이러한 흐름 속에 헬베티카(서체)는 설령 도태될지 모르지만, 헬베티카(양식)는 영원불멸할지도 모르겠다. 객관의 세계에 이보다 더 적합한 얼굴(typeface)을 찾기란 힘들지 않을까.


좌측 - helvetica / 우측 - roboto



'헬베티카의 표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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