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 리뷰
거칠어진 마음이 날카로운 가시가 된 고슴도치 같은 사람이 있다. 절대 남에게 곁을 두지 않는 그런 사람들은 누군가를 안아주지도, 누군가에게 안기지도 못한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짓눌린 만큼 타인의 시간도 무겁게 누른다. 각자의 기억에 갇힌 채 무거워진 삶, 그리워지는 기억과 그 사이에 숨긴 진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외로운 만큼, 곁에 있는 사람들도 참 외롭게 만든다. 나빠서가 아니라 서툴고 부족하기 때문에…….
60년대생 윤희
윤희(김희애)는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생활을 끝낸 후 고등학생 딸 새봄(김소혜)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 앞으로 일본에 살고 있는 오랜 친구 쥰(나카무라 유코)의 편지가 도착한다. 써놓고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쥰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가 보낸 것이다. 윤희의 딸 새봄은 엄마 몰래 엄마 편지를 읽은 후, 쥰을 만나게 해주기 위해 엄마에게 일본 여행을 제안한다. 새봄의 사려 깊은 남자친구 경수(성유빈)가 함께 쥰의 흔적을 쫓는다.
분명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60년대에 태어난 듯한 윤희는 사회의 시선과 강퍅한 가족의 그늘 뒤로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윤희의 부모는 오빠만 대학을 보냈고, 그 미안함에 윤희 엄마는 아빠 몰래 그다지 좋지 않은 카메라 하나를 선물했다. 첫사랑은 가족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졌고, 오빠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했다. 속 깊은 딸 새봄과 함께 살아가지만, 딸조차 너무 시들어버린 삶에 충분한 물기가 되어주진 못한다. 별다른 삶의 목표 없이 그냥 태어났으니 죽기 전까지 살아가기로 한 것 같다.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는 꾹꾹 눌러쓴 러브 레터 한통으로 삶의 볕을 얻은 한 여인의 삶을 담담하게 격려하는 영화다. 윤희는 책임감으로 딸 하나 제대로 키우기 위해 급식실에서 돈을 버는 것 이외에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지도 않는 선인장 같은 삶에 불쑥 들어온 것은 오랜 친구 쥰의 편지다.
쥰의 편지에 이끌려 떠난 여행, 딸과 함께 있지만 윤희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시간과 축복처럼 충분히 그리워할 수 있는 마법의 공간은 온통 물기로 가득한 눈 덮인 일본의 오타루이다. 어쩌면 쥰과 마음을 나누었던 고등학생 시절의 자신과 같은 나이의 새봄은 오롯이 자신의 삶과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윤희는 윤희로 살기로 했다
속 깊은 딸 새봄은 어쩌면 평생 비밀로 묻어둔 엄마의 비밀을 넉넉한 마음으로 품는다. 굳이 말로 꺼내 이해하는 척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새봄의 성숙함은 윤희에게 새로운 봄을 선물한다. 쥰과 윤희가 십 수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장면은 너무나 잔잔하고 무덤덤하다. 묻어둔 시간만큼 반가움도 조심스럽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감독은 충분히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정화된 눈물 위로 두 주먹 불끈 쥐지 않은 윤희의 모습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왠지 단단해 보인다.
윤희의 숨겨졌던 과거는 편지를 통해 현재로 되돌아왔다. 마음을 외면한 죄의식과 그리움, 그리고 각자 상실을 극복하는 다른 방식 때문에 그 표정이 다른 윤희와 쥰의 진심은 서로 다른 언어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너무 멀어졌다고 생각했고, 그리움은 서로의 마음에 가닿지 못했지만 서로 마주하고서는 순간 평생의 그리움은 미래를 살아가는 위안이 된다. 그래서 이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기억만이 오롯한 진심이 된다.
‘윤희에게’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윤희와 쥰의 관계는, 격정적인 결말에 이르지 않는다. 감독은 두 여성의 이야기가 ‘비밀’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자체에 방점을 찍은 이야기라는 사실을 긍정한다. 더불어 평생 거짓말 속에 살아온 사람을,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타인의 삶도 외롭게 만든 그 비밀을 비난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폭력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연약한 사람들의 작은 행복을 끝내 깨버렸다. ‘윤희에게’의 이야기는 차별에 대한 사회적 맥락에 가 닿아 있지만 감독은 어떤 다양한 함의와도 상관없이 지극히 윤희, 개인의 입장에 집중한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을 한 연약한 여인의 상황을 인정하고, 까슬거리는 마음의 각질을 굳이 벗겨내려 하지 않는다.
과거의 윤희는 나침반을 읽을 줄 몰랐던 삶의 길치였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겠노라 선택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을 용서해주는 순간, 한발도 앞서나가지 못하게 채워진 그 발의 족쇄가 사실은 거대한 돌덩이가 아닌, 어두운 그림자였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봄은 왜 사람은 찍지 않느냐는 삼촌의 질문에
‘자기는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고 말한다.
그런 새봄이 일본에서는 카메라에 윤희의 모습을 담는다.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 엄마가 아닌 사람 윤희의 모습이 새봄에게는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다. 결국 웃음을 잃었던 과거의 윤희는 미래의 윤희에게 새롭게 살아가도 좋다고 웃어준다. 그래서 비록 예쁜 시절을 어둠을 기어 다니느라 다 써버렸다 해도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볕으로 한 걸음 성큼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의 윤희는 알고 있는 것 같아 참 아름답다.
명대사
나도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이 없으니까.
윤희에게 (2019)
•감독 : 임대형
•출연 : 김희애(윤희), 김소혜(새봄), 성유빈(경수), 나카무라 유코(쥰)
•국내개봉일 : 2019.11.14.
•관객수 : 122,784명
•볼 수 있는 곳 :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왓챠, U+모바일, 네이버 시리즈온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