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이네 마당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심은 나무였습니다. 할머니는 늘 그 나무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나무는 약속을 먹고 자란단다."
시원이는 어릴 때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나무가 어떻게 약속을 먹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을 하면 열매가 맺히고, 지키면 익고, 어기면 떨어진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무에는 열매가 거의 열리지 않았습니다. 가끔 조그만 열매가 맺혀도 금방 떨어졌습니다.
"할머니는 약속을 참 잘 지키셨단다."
아빠가 말했습니다.
시원이는 나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가지만 있고,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한솔이가 시원이에게 다가왔습니다.
"형, 내일 나랑 놀아줄 수 있어?"
시원이는 숙제를 하다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응, 학교 끝나면 바로 올게."
"진짜?"
"응, 약속해."
한솔이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날 밤,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당에 나갔던 한솔이가 뛰어 들어왔습니다.
"형! 나무에 뭐가 생겼어!"
시원이가 따라 나가 보니 정말이었습니다. 나뭇가지 끝에 아주 작은 열매가 하나 맺혀 있었습니다.
구슬보다 작았습니다.
"……진짜네."
한솔이가 열매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형이 약속해서 그런 거야?"
시원이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저 작은 열매를 한참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다음 날, 시원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친구들이 다가왔습니다.
"시원아, 우리 축구하러 가자!"
"오늘 날씨 진짜 좋다. 같이 가자!"
시원이는 잠깐 망설였습니다. 한솔이와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벌써 운동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하고 가면 되지.'
시원이는 친구들을 따라갔습니다.
축구는 재미있었습니다. 한 게임만 하려던 것이 두 게임이 되고, 세 게임이 되었습니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어, 벌써 이렇게 됐네."
시원이는 그제야 집으로 뛰었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한솔이는 마당에 있었습니다.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습니다.
떨어진 열매였습니다.
시들어서 까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한솔이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이 빨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시원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시원이와 한솔이는 예전처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한솔이는 형을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시원이를 불렀습니다.
"시원아, 이번 주말에 할머니 산소에 가려고 해. 같이 갈 수 있지?"
시원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같이 갈게요."
"약속이야?"
"……네, 약속이요."
그날 밤, 나무에 또 작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시원이는 창문으로 그 열매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주 작고, 여렸습니다.
'이번엔 떨어뜨리면 안 돼.'
토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시원이가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 민재였습니다.
"시원아! 오늘 재현이 생일파티야! 너도 와야 해!"
"생일파티?"
"응, 피자도 먹고 게임방도 간대. 진짜 재밌을 거야!"
시원이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재현이네 생일파티. 친구들도 다 모이고 게임방도 가고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몇 시야?"
"열한 시! 빨리 와!"
시원이는 창밖을 보았습니다. 나무가 보였고, 작은 열매가 달려 있었습니다.
엄마가 부엌에서 말했습니다.
"시원아, 열 시에 출발하자. 준비됐어?"
시원이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엄마, 저 오늘 친구 생일파티가 있는데……"
엄마가 부엌에서 나왔습니다.
"생일파티?"
"네…… 다녀와도 돼요? 할머니 산소는 다음에……"
엄마는 한참 동안 시원이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 알았어. 재밌게 놀다 와."
시원이는 생일파티에 갔습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마당의 나무가 보였습니다.
열매가 또 떨어져 있었고, 까맣게 시들어 있었습니다.
시원이는 발이 멈췄습니다.
거실에는 엄마, 아빠, 한솔이가 있었습니다. 할머니 산소에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솔이가 시원이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엄마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밥 먹으렴."
그게 전부였습니다.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게 더 힘들었습니다.
그날 밤, 시원이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한솔이와의 약속. 엄마와의 약속.
시원이는 그 열매들을 바라보며 앉았습니다.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한솔이였습니다.
"……형, 뭐 해?"
"……그냥."
한솔이가 형 옆에 앉았습니다. 둘 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한솔이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형, 왜 자꾸 약속을 안 지켜?"
시원이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한솔이 약속도 안 지키고, 엄마 약속도 안 지키고."
"……"
"형은 약속할 때 거짓말하는 거야?"
"아니야."
시원이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진짜야. 약속할 때는 진심이야. 진짜 지키고 싶어."
"그런데 왜?"
시원이는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몰라. 그때는 진심인데, 막상 그날이 되면 다른 게 하고 싶어 져. 친구들이랑 노는 게, 그때는 그게 더 좋아 보여."
"그럼 나는?"
한솔이의 목소리가 작아졌습니다.
"나는 안 좋아?"
시원이는 동생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솔이의 눈이 젖어 있었습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런데 왜 자꾸 안 와?"
시원이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왜 그랬을까요.
한솔이와 노는 게 싫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엄마랑 할머니 산소에 가기 싫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다른 걸 선택했을까요.
시원이는 떨어진 열매를 집어 들었습니다. 차갑고, 딱딱했습니다.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할머니는 큰 약속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작은 약속들. "내일 아침에 호떡 해줄게." "저녁에 옛날이야기 해줄게." "일요일에 같이 시장 가자."
그리고 늘 지켰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정말 호떡 냄새가 났고, 저녁이면 정말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요.
"……할머니는."
시원이가 천천히 말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나 봐. 마음으로."
한솔이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마음으로?"
"응. 나는…… 약속할 때는 진심인데, 지킬 때는 아니었던 것 같아. 그냥 하고 싶은 거 했어."
시원이는 나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약속을 지키려면, 지키고 싶어야 하는 거구나. 그때 가서도."
한솔이가 물었습니다.
"그럼 형은 지키고 싶어?"
"……응."
"진짜?"
시원이는 동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진짜야. 근데…… 잘 안 될 것 같아서 무서워."
한솔이는 한참 동안 형을 보다가 말했습니다.
"형, 그러면 나한테 약속해 봐."
"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겠다고."
"……그게 무슨 약속이야."
"약속이야. 나한테 하는 거야."
시원이는 웃음이 났습니다. 이상한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의 눈은 진지했습니다.
"……알았어. 약속할게.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게."
"진짜지?"
"응, 진짜야."
한솔이가 작게 웃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시원이는 일찍 일어났습니다.
부엌에 가니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응?"
"저번에…… 할머니 산소 못 가서 죄송해요."
엄마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다음에 꼭 같이 갈게요. 약속해요."
엄마는 한참 동안 시원이를 바라보다가 웃었습니다.
"그래, 알았어."
시원이는 한솔이에게도 갔습니다.
"한솔아."
"응?"
"오늘 저녁에 같이 책 읽자. 약속해."
한솔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응."
저녁에, 시원이는 정말 한솔이와 책을 읽었습니다. 친구가 전화해서 놀자고 했지만, 시원이는 말했습니다.
"미안, 나 오늘 약속 있어."
전화를 끊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시원이는 작은 약속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엄마, 오늘 설거지 도와드릴게요."
"아빠, 주말에 할머니 산소 같이 가요."
"한솔아, 내일 아침에 같이 학교 가자."
쉽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부를 때, 게임이 하고 싶을 때, 그냥 쉬고 싶을 때. 약속을 지키는 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떨어진 열매가 떠올랐습니다. 한솔이의 빨간 눈이 떠올랐습니다. 엄마의 한숨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될 거야.'
매일 아침 시원이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어느 날, 한솔이가 소리쳤습니다.
"형! 나무 봐!"
시원이가 마당으로 나가보니 나무에 열매가 달려 있었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것보다 컸고, 조금씩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떨어지지 않았네."
한솔이가 웃었습니다.
"형이 약속 지켜서 그런 거야?"
"……그런가?"
아빠가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열매를 보더니 눈이 커졌습니다.
"어, 이거…… 오랜만이다."
엄마도 나왔습니다.
"정말이네. 할머니 돌아가시고 처음인 것 같아."
가족 네 명이 나무 아래에 섰습니다. 열매는 아직 다 익지 않았지만, 떨어지지 않고 조금씩 자라고 있었습니다.
주말이 되었습니다.
시원이는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할머니 산소에 가는 날이었습니다.
"준비됐어?"
아빠가 물었습니다.
"네."
차를 타고 산으로 갔습니다. 할머니 산소는 작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시원이는 할머니 앞에 섰습니다.
'할머니, 저 약속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아직 잘 못하지만, 계속 노력할게요.'
엄마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겠다."
돌아오는 길, 한솔이가 시원이 손을 잡았습니다.
"형, 오늘 와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약속 지켰잖아."
시원이는 동생을 보았습니다.
"응, 지켰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한솔이가 먼저 소리쳤습니다.
"형! 열매!"
나무에 달린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었습니다.
정말 빨갛고, 탐스러웠습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습니다.
엄마가 말했습니다.
"……익었네."
아빠가 조심스럽게 열매를 땄습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작은 사과 같았습니다.
"넷이서 나눠 먹자."
아빠가 열매를 네 조각으로 나눴습니다.
시원이가 한 조각을 입에 넣었습니다. 달았습니다.
정말, 정말 달았습니다. 먹어본 어떤 과일보다 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목이 뜨거워졌습니다.
엄마의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할머니 생각나네."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가 해주셨던 호떡 맛 같아."
한솔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할머니 잘 기억 안 나는데…… 근데 마음이 따뜻해져."
시원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할머니의 손이, 할머니의 목소리가, 할머니가 지켜주셨던 수많은 약속들이.
'할머니, 저도 그렇게 할게요.'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저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될게요.'
저녁이 되었습니다.
시원이와 한솔이는 마당에 나와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열매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가지 끝에 아주 작은 것이 보였습니다.
새로운 열매였습니다. 아직 구슬보다 작았습니다.
한솔이가 물었습니다.
"형, 이제 약속 잘 지킬 수 있어?"
시원이는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모르겠어. 또 못 지킬 수도 있어."
"그럼 어떡해?"
"그래도 계속 노력할 거야. 그게 내가 나한테 한 약속이니까."
한솔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도 도와줄게."
"어떻게?"
"형이 약속 잊어버리면 내가 말해줄게. '형, 약속 있잖아' 하고."
시원이가 웃었습니다.
"……고마워."
나무 위로 별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열매가 바람에 살랑거렸습니다.
시원이는 생각했습니다.
약속은 어려운 거구나. 지키는 건 더 어렵고. 하지만 그래서 소중한 거구나.
할머니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