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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운 Oct 24. 2021

프롤로그

눈동자의 시절은 어디서 왔을까 ?


 홀로 세계여행을 총 19개월 하였고, 2019년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그 시간들을 기록해보기로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눈동자의 거울'이었던 시절, 배낭여행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의 눈동자를 연필로 그리고 이야기로 담아냈습니다.




 “ 네 눈이 바라보던 / 내 눈의 뿌연 거울 ” ( 「 오래된 일 」 )의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이 아득한 것 같다가, 참혹할 만큼 생생한 일이었다가, ‘나’는 그 기억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 기억의 의미를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며, 시간의 무서운 힘 앞에서 언제나 ‘나’는 무력하다는 걸.     

 허수경 시인이 오래전 “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 ( 「 공터의 사랑 」, 『 혼자 가는 먼 집 』 )고 노래한 것처럼, 사랑과 세월에 대해서 내내 수동적이고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과 사랑이라는 일의 근본적인 조건이 ‘가사성(可死性, Mortality)’이라면, ‘나’는 사라질 수 있거나, 사라진 것들만을 사랑하며, 결국은 미약한 기억의 힘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남은 일은 그 ‘오래된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호명하는가 하는 일,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살아 있는 동안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일.     


 “눈동자의 시절”은 언제인가? “네 눈이 바라보던 / 내 눈의 뿌연 거울”의 시절. ‘너’와 ‘내’가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로 나뉘던 장면이 아니라, 서로가 눈동자의 거울이 되었던 시절. ‘시선의 시간’이 아니라, 오직 “눈동자의 시절”이었던 날들.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 지독한 봄날의 일”.


 모든 것이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던 시간. “그 지독한 봄날”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오래 되었다.’는 시간의 감각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하냥 먼 너머로 사라졌네”라고 말할 때, 그 ‘먼 너머’는 도대체 어디쯤인가? 얼마만큼의 물리적 시간이 지나면 ‘오래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들이 올까? 더 이상 그 장면의 세부와 감각이 분명하지 않거나, 그 기억들을 잃어버리고 왜곡한다고 생각되어질 때쯤이면? 생의 감각이 시간의 감각일 수밖에 없다면, ‘내’가 시간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대면하는 장면들.   

  

ㅡ 허수경,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문학과 지성사, 2016, pp.148~150

이광호 해설, 「 저 오래된 시간을 무엇이라 부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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