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케니 지(Kenny G)는 재즈가 아니다?

아무렴 어때

by 장미화

우리 동네 크리스마스 마켓이 문을 열었다.


‘이스탄불의 크리스마스’를 이야기하면 지인들이 묻는다. 거기 이슬람 국가 아니냐고. 사실 튀르키예는 국교가 없는 세속국가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입장일 뿐 국민의 99퍼센트가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한다. 99퍼센트라… 그럼 거의 전 국민이 무슬림이라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애잔’(기도시간을 알리는 노래)이 울려 퍼질 때 기도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99퍼센트’라는 수치를 믿어도 되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35세 이하 청년층의 90퍼센트가 자신은 비종교적이라 답했다고 한다. 이슬람이든 불교든 간에 분명한 건, 이들도 크리스마스를 즐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크리스마스를 과하게 사랑한다. 조금 멋쩍긴 하지만 종교는 없다.

빨강 노랑 단풍들이 떠난 빈자리가

아스라이 꿈꾼 것만 같을 때,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 잎새가

쓸쓸하게 흔들릴 때,

청명하던 하늘이 스산하게 우중충해질 때,

내 몸 어딘가에서 크리스마스 스위치가 켜진다. 달력을 보면 늘 11월 15일 언저리다.


그러므로 내가 크리스마스를 기리는 기간은 정확하다. 11월 15일부터 12월 25일까지. 정확히 12월 26일 새벽 12시에 스위치가 꺼진다. 그땐 호박마차가 찾아와도 소용없다. 사탕 전구와 캐럴은 마치 맞지 않은 유리구두를 어거지로 꼬인 신데렐라의 언니들처럼 생뚱맞다. 그러니 이 한 달 남짓한 크리스마스 시즌이 내게는 너무 소중한 기간이다.




내게 크리스마스는 '사탕 전구'다. 요새는 크리스마스트리도 아주 세련됐다. 커다란 트리 가득 빨간 리본이나 곰돌이만 주렁주렁 매달거나, 혹은 금색이나 은색 등 한 가지 통일된 색깔로 우아하게 꾸민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에 띈다. 조명도 노란색 앵두전구가 은은하니 예뻐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나의 크리스마스트리는 늘 알록달록한 사탕 전구여야 한다. 우리 집 거실에 있던 벤자민 나무에 전구를 둘둘 감은 나의 첫 크리스마스트리. 반질반질한 초록 이파리 사이사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빛은 뒷목을 간질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오너먼트도 없고, 별도 없는 벤자민 크리스마스트리가 완벽했다는 것 밖엔.


그리고 내게 크리스마스는, ‘케니 (Kenny G)’다. 종소리에 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11월 15일이 되면 나는 홀린 듯이 케니지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재생한다. 내게 케니지를 처음 알려준 사람은 바로 아빠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 낭만을 얹어 준 사람은 아빠가 아닐까 싶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처럼 개울물에 돌멩이를 던지고 얼굴을 비추곤 했다는 아빠… 아빠가 케니지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사 온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우리 딸, 이것 봐라~" 하며 아빠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네모난 음악 CD였다.

깜찍한 아가의 뒤태가 돋보이는 앨범 재킷! 버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것만 같은 서양남자의 느끼함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빠가 꺼낸 동그란 시디를 삼킨 전축에선 녹아내릴 듯 감미로운 연주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달콤한 세계에 홀딱 반해 버렸다. 모두가 잠든 밤, 거실에 있던 커다란 전축에 해드폰을 꽂고 앉아 케니지의 캐럴을 들었다. 음악의 힘은 참 신비로운 것이다. 아름다운 선율은 밤마다 거실에 솜처럼 흰 눈을 내려주었다. 벤자민에 감아놓은 빨강, 파랑, 초록의 사탕 전구가 꿈꾸듯 반짝이고 있었다.


사탕 전구 + 케니지의 조합은 이미 낭만 치사량이었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주인공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케니 지 스타일의 상업적 재즈를 경멸한다. 물론 세바스찬은 정통 재즈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캐릭터니 그럴만하다. 재즈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케니지는 재즈가 아니라고 평가되는 것 같다. (물론 케니지 본인도 자신을 정통 재즈뮤지션이라 주장하지 않음) 그러나 내게 케니지는 다른 차원이다. 재즈 뮤지션들이 케니지를 미워해도 상관없다. 내게 케니지의 캐럴은 크리스마스 그 자체니까. 딸의 마음에 감성을 심어주고 싶었던, 나의 영원한 산타가 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