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변함없이 그곳에 있다

by 장미화


선입견이나 열등감이 녹아나는 글은 좋지 않은 글이다.

여성성이나 남성성이 지나치게 드러난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최악의 글은 징징대는 글이다.

바로 내가 오늘 쓰기로 맘먹은 이 글처럼 말이다.


타지에서 아프면 서럽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 사랑하는 지인들이 가장 많이 해준 말이다.


“타지에서 아프면 서러우니까, 건강 잘 챙겨.”


내 나라든 남의 나라든 아프면 서러운 건 같지만,

내 나라가 지금 이게 나라인가 싶게 휘청대고 있는 현실이지만,

확실히 남의 나라에서 아프면 조금 더 서러운 건 맞는 것 같다.


일단 모두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나의 경우는, 첫 번째,

타지에 나와있으니 병원과 멀어진다. 원래도 병원하고 안 친하긴 했지만 지금은 웬만하면 병원은 피한다.

의사소통이 완벽하지 않은 상황과, 그 연장선으로 내가 받는 진료가 과잉진료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다. 더구나 일부 진료의 보험이 안되기라도 한다면, 지나치게 부과되는 병원비 때문에도 그렇다.


두 번째는 엄마가 없어서다.

참 내가 쓰고도, 다 늙은 아줌마가 뭔 어린애 같은 소린가 싶다.

그런데 말 그대로다. 엄마가 너무 멀리 있다는 사실이 서럽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도 내가 아프다고 엄마 도움을 받은 기억은 많지 않다.

크게 아픈 적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가까운 이들에게 징징대는 성격도 아니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도 온전히 내 힘으로 키우기에,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엄마를 호출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새삼 엄마가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이 서러운 것이다. 엄마와 나 사이의 그 아득한 거리가 슬퍼지는 것이다.

살면서 희한하게 엄마 꿈을 꿔 본 기억이 없다. 하긴 희한할 것도 없다. 내 자식들 태몽도 안 꿨으니 말이다.

그런 내가 이번에 엄마 꿈을 꿨다.


“꿈에서 엄마가 밥 해줬어.”


이 얘기를 이스탄불에 3년째 살고 있는 친구한테 무심결에 꺼냈다. 그러자 그 친구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게 아닌가?

타지에서 아플 때 어린애 마냥 엄마 생각을 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엄마를 여읜 다른 친구는 말한다.


“으이그, 울 일이 아니라 살아계실 때 효도나 해라.”


엄마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대상 항상성’이란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심리학 용어 중 하나다. 대학 시절 심리학 수업에서 처음 들었는데, 뇌리에 깊이 박혀 잊히지 않았다.

‘대상 항상성’이란 엄마(주양육자)가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보이지 않더라도, 그가 언젠가 돌아올 것이며 자신과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엄마와 아기의 일대일 관계에서 성취해야 하는 발달의 최종 목표라고 한다.

이 대상 항상성이 잘 형성되어야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걸 믿게 된다고도 한다.


엄마와의 거리가 멀어지니까 연결의 선이 희미해진 걸까? 타지에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무엇보다 아픈 내 모습이 나 조차도 보기 싫다. 철저히 혼자라는 생각이 자꾸만 치민다.


와중에 거실에 있는 내 아이의 기침 소리를 들으니 몸이 벌떡 일으켜진다.

혹시 나한테 몸살이 옮았나 싶어서다.

천근만근인 다리를 질질 끌고 주방으로 간다. 서둘러 물을 끓여 꿀차를 타 내민다.


첫째 아들이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엄마… 이게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 같은데?”


"그러네. 그런데 엄마는 챙겨주는 사람이 없네."


옆에서 듣고 있던 둘째가 재빠르게 치고 들어온다.


“엄마, 내가 어제 다리 주물러준 거 기억하지?”


“그래, 고마웠다…”


10분 뒤에 아이들이 내게 와서 묻는다.


“엄마, 오늘 저녁은 뭐야?”


확실히 아들들은 공감능력이 아주 조금,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싸매고 누워있는 내 주위를 먼지 날리도록 뛰어다니며 논다.

아픈 엄마를 위해서 묵념이라도 해 주길 바라진 않는다. 차라리 아이들이 행복해서 낫다.

머리는 깨질 것 같은데 피식 웃음이 난다.


너희가 아플 때 엄마를 찾듯이

나도 내가 아플 때는 우리 엄마를 생각하련다.

엄마가 지금 보이지 않아도, 손 닿을 곳에 없어도, 변함없이 내 곁에 있다는 것.

몸이 아파서 잠시 흔들려도 곧 털고 일어날 거라는 믿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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