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튀르키예가 한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아타 튀르크’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를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설한 그의 본명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Atatürk)는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튀르키예 국민 의회에서 받은 성씨다. 하지만 그가 끝내 이 성씨를 물려받을 사람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결국 그를 뜻하는 고유어가 되었다. 아타튀르크는 국부인 동시에 튀르키예 어를 만든 사람이다. 터키 알파벳법 제정으로 아랍 문자를 폐지하고 라틴 문자를 도입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아타튀르크를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친 것과 같이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아타튀르크는 돌마바흐체 궁전의 방 하나를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삼아 생활했다. 그곳에서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 집무를 보는 중에 사망했다. 그래서 돌마바흐체 안에 있는 모든 시계는 9시 5분에 멈춰있다.
내가 처음 아타튀르크 서거일을 알게 된 건 2년 전이다. 튀르키예어 학원에 다닐 때였다. 오전 8시 30분, 1교시가 시작되자 교실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전에 없이 어둡다. 심지어 위아래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선생님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교실에서는 튀르키예어만 사용하던 터라 나는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선생님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고 옆에 앉은 학생이 영어로 속삭였다.
“오늘이 아타튀르크의 사망일이래. 그래서 그런가 봐. 아마도?”
아하, 튀르키예 사람들의 아타튀르크 사랑은 종교 이상이라더니…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선생님이 느닷없이 눈물을 왈칵 쏟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깜짝 놀라 선생님의 손에 휴지를 쥐어줬다. 늘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쉬운 단어와 문장만을 느린 속도로 얘기하던 선생님이, 북받치는 감정과 함께 빠른 말들을 쏟아낸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감정이 전이되어 분위기가 사뭇 숙연해졌다. 학생 중에 스페인에서 온 연극배우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공감능력이 뛰어난지 벌써 휴지로 코를 풀어가며 울고 있었다.
느닷없이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정확히 9시 5분이었다. 우리는 일제히 교실 뒤에 붙은 커다란 창문으로 달려갔다. 창 밖의 풍경은 놀라웠다.
길을 걷던 사람들, 상점 문을 열던 사람,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던 사람, 노상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사람, 차이를 서빙하던 점원… 모두가 ‘그대-로 멈춰라!’를 외친 듯 정지했다. 도로에 지나가던 차들까지 싹 다 멈췄다. 운전자들은 아예 차 문을 열고 나와 섰다. 아타튀르크에 대한 사람들의 깊은 존경심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선생님은 우리로 치면 ‘국어 선생님‘인 것이니, 아타튀르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겠다 싶었다. 아타튀르크가 아니었다면, 과연 사람 손으로 쓰는 것이 가능한지 늘 궁금한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타튀르크의 언어개혁 전에는 아랍 문자로 터키어의 정확한 표기가 어려워 문맹률이 높았다고 한다.
어학 공부를 위해 가끔 튀르키예 드라마를 본다.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아타튀르크를 암살위험에서 구하는 넷플릭스 시리즈인 <페라 팔라스의 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미래에서 온 주인공이 터키어로 남긴 쪽지를 아타튀르크에게 전하며 병사가 말한다.
쪽지를 받아든 아타튀르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가 말했다.
외국인인 내가 보기에도 감동적인데 터키인들에겐 오죽할까 싶다.
처음으로 쿠란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하였소. 이것은 최초로 튀르키예어로 번역되는 것이오. 무함마드의 삶에 대한 전기도 번역하도록 명령하였소. 국민들이 읽게 하여,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배만 채울 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도 깨닫길 바라오.
_ 아타튀르크
물론 아타튀르크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그는 오스만 제국 출신임에도 정교분리, 세속주의를 추구했다. 덕분에 지금의 튀르키예는 세속주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위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후기에 이를수록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아타튀르크를 철천지 원수로 인식한다고도 한다.
아타튀르크는 남녀평등에 앞장섰다. 관공서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히잡을 벗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아타튀르크의 양녀인 사비하 괵첸은 세계 최초의 여성 파일럿이 됐다. ‘사비하 괵첸’은 이스탄불에 사는 한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이스탄불 3개 공항 중 하나가 바로 그녀의 이름을 붙인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이기 때문이다.
인간 공동체는 여성과 남성이라 불리는 두 성별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집단 중 일부는 전진시키자 하고, 다른 일부는 무시하자고 하면 전체가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나의 집단의 절반은 쇠사슬로 묶어놓고, 나머지 부분은 하늘처럼 떠받들여지는 것이 가당키나 하는가? _아타튀르크
간혹 아타튀르크가 일찍 사망해서, 자녀가 없어서, 혹은 잘 생겨서(!) 그토록 사랑받는다는 견해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가 나라의 운명을 바꾼 인물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옳은 방향으로 이끈 ‘큰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일 년에 한 번, 튀르키예를 멈추게 하는 사람. 이스탄불의 한 복판, 11월 10일 9시 5분의 공기 속에 설 때면 나는 웅장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