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화 장관님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4년간 장관님 집 옆 빌라에 거주했던 (구) 이웃입니다. 너무 정들고 행복했던 집을 떠나며 싱숭생숭한 마음에 작은 작별의 편지를 띄웁니다.
4년 전 저는 부동산 아줌마, 집주인아저씨와 409호 문을 열었습니다. 작은 예산으로 본 서울의 집은 곰팡이 가득한 반지하, 창문 없는 닭장 같은 방들이 전부였기에 큰 기대도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발을 딛는 순간 ‘이 집이다!’ 싶었습니다. 큰 창으로 환한 햇살이 방 한가득 들어왔습니다. 집주인아저씨는 바로 옆집이 강경화 장관님 댁이라며 터가 좋은 곳이라 너스레를 떠셨고, 부동산 아줌마가 방의 큰 샤시를 활짝 열었을 때! 바로 보이는 장관님 집, 그리고 마당에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장관님이 보였어요. 부동산 아줌마는 크게 손짓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강경화 장관니임~~ 안녕하세요~~ 제가 장관님 어엄청 좋아해요~~!’라고 소리치셨고 당황하던 집주인아저씨가 더듬대며 인사드렸던 것이 생각나요. 그 순간부터 제 마음은 이 집에 정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여성 지도자 옆집에 사는 거야!’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 집에서 성공해서 외국에 나가야지. 의지를 다지며 본가에서 ‘그래마 인 유즈’도 가져왔습니다. 결국은 몇 번 펼쳐보지도 못했지만요.
저는 서울에 올라오고 얼마간 들떴어요. 영화를 할 수 있을 줄 알았고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어요. 다시는 하고 싶지 않던 영상 외주를 여기서도 계속해야 했고, 매일 타인의 인스타 피드를 보며 점점 더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게다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두려웠어요. 지금 돌이켜보니 무얼 한다고 해서 번듯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매일 아침 5시 반이면 연세대 운동장을 달렸습니다. 심장이 마구 뛰어야 살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달릴 기운도 없는 날에는 스스로를 자책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지낼 거면 왜 다 접고 올라왔어?’라는 생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어요. 하지만 서울은 서울이더군요. 집 근처 공간에서 무료로 진행하던 미술상담치료를 받았고 가끔 영상작업하는 친구의 작업실에 들러 허황된 미래를 꿈꾸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계속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고, 친구들과 뮤직비디오를 찍었고, 미국 뉴스 채널 론칭 팀 조연출을 했습니다. 가끔 신흥 부르주아 사장님들 골프 영상을 찍어주는 외주도 했습니다. 골프장에서 돌아와 가편집 하던 밤은 유독 길고 쓸쓸했습니다. 이건 그냥 일인데, 남들도 다 돈 벌려고 일하는 건데 왜 그리 자주 초라해졌던지.
장관님, 저는 아마 그때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겨우겨우 버티기만 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면 무턱대고 고향 제주로 도망갔습니다. 다니던 병원에서는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던 제가 갑자기 제주도에 간다고 하니 무슨 결심(?)이라도 한 줄 알고 경찰서에 연락하는 방법을 알려주더군요. 제 친구들은 집에 김밥을, 아이스크림을 보내주고 한밤중에 택시를 타고 달려왔습니다. 저는 친구들의 요령 없는 다정함에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 평 남짓한 작은 테라스에 캠핑 테이블을 펼쳐놓고 장관님 집 마당을 바라보며 밥 먹길 좋아했어요. 모든 것이 유료인 서울에서 햇살과 바람을 무료로 맞으며 녹음이 우거진 남의 집 담장 안을 보는 게 즐거웠다고 조심스레 고백합니다. 장관님 댁 흰 강아지가 저를 정말 싫어했던 거 알고 계셨나요? 제가 빨래를 널거나 테라스에서 넷플릭스를 볼 때마다 미친 듯이 짖어댔어요. 제가 공짜로 마당을 보는 게 싫었을까요? 파란 파라솔을 펼쳐두고 갓 씻은 자두와 복숭아를 깨물어 먹는 여름은 얼마나 찬란했던지요. 저는 집에 오는 손님들마다 그 자리에 앉히며 여기가 유럽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직접 한 요리를 대접하고 테라스에서 수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아팠던 시간들, 그럼에도 여전한 우리들의 꿈 그리고 언제까지 서울에서 살 수 있을까… 얘기하다 공기가 멈추면 우린 같이 장관님 댁 큰 나무와 초록 담쟁이를 칭찬했어요. 와 너무 좋다. 너무 아름답다. 벚꽃 잎이 살랑 날아와 우리 앞에 떨어졌습니다. 나 여기보다 더 좋은 집 찾을 수 있을까? 여기를 봐버려서… 감히 추천할 곳이 없네. 친구는 대답했어요. 장관님의 이웃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 받은 일이었는지요. 새삼스레 감사합니다.
너무 좋은 집이라 저를 놓아줄 수 없었던 걸까요? 새로운 곳으로 터전을 옮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둔 커튼과 카펫도 다 남 줘버리고, 소파도 팔고, 문에 예쁘게 모아두었던 엽서들도 다 버렸습니다. 놀러 오는 사람마다 칭찬했던 집도 다 치우니 4년 전 맨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연희동 집을 정리하며 나만의 의식 같은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상은 밤새 이삿짐을 싸서 친구 트럭에 보내고 쓰레기가 가득한 바닥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어요. 온몸은 땀으로 젖고. 나는 이제 정말 갈 곳이 없는데… 힘을 내야 하는데…
장관님, 그거 아세요? 장관님 댁 큰 목련나무는 저의 ‘내 나무’입니다. 매년 봄이면 샤시를 열고 그 나무의 매일매일을 관찰했어요. 통통한 눈에서 크고 하얀 꽃잎을 낼 때, 그 꽃잎이 갈색이 되어 떨어지는 동시에 여린 연둣빛 잎이 돋아나고 금세 초록 잎이 무성해지곤 했지요. 저는 매일 아침을 내 나무를 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저 나무는 제가 떠나도, 언젠가 장관님이 떠나도 그 자리에 오래도록 있겠지요?
서울살이를 힘겨워하는 제게 친구는 저금통과 메모지를 사주며 행복한 일을 여기 저금하라고 했어요. 이번에 4년 만에 저금통을 깼습니다. ‘햇살에 마르는 빨래 냄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환기하고 노래 듣고 향 피우기’, ‘딸기를 먹은 것’, ‘촬영 끝나고 집 청소할 때’ 등등 적혀있더군요. 정말 별 볼일 없어서 슬며시 미소 지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쉽게 행복해지는 법을 연희동 집에서, 장관님의 이웃으로 살면서 깨쳤습니다. 여러 슬픔과 기쁨이 번갈아 일어났지만 돌이켜보니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매일 연습하며 살았더라구요.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제가 장관님 마당을 더 누리는 것 같다며 장관님 댁으로 종이비행기 라도 날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웃었습니다. 4년 전엔 감히 못 날린 종이비행기에 그간 배우고 깨치고 누린 것을 꾹꾹 적어 실어 보냅니다.
이사 한 달 전부터 가끔, 내게 이런 소중한 집이 다시 올 수 있을까 가만히 창가를 바라보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이 집에서 보낸 여름, 가을, 겨울, 봄 그리고 다시 여름. 연희동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났는데요 여전히 마음은 햇살 가득 테라스에, 담장 벽 가득 코랄빛 장미에, 푸르른 내 나무에 두고 왔습니다. 친구들에게 장난으로 우리 집에서 장관님 댁이 바로 보인다고 놀러 오라고 꼬시던 때가 생각나네요. 언제나 제 보금자리의 자랑이던 장관님, 잘 지내시지요? 장관님 댁 목련 나무는 언제나 제 마음속 ‘내 나무’ 일 거예요. 함께 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장관님의 이웃으로 살았던, 연희동 옆집 사람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