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간소하게 산다. 혼자 산다고 해놓고 생각해 보니 우리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다. 인간 나이로 따지면 나랑 비슷한 또래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반려동물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위로가 된다. 아무튼, 오늘 하려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Simple living
나는 정말로 간소하게 산다. 최소한만 소유하고 최소한만 소비하고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유지한다. 무슨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환경주의자나 반소비주의자 뭐 이런 활동가도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단순하게 살고 싶어서 이리 살고 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할 만큼의 돈도 없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물욕도 없는 편이다.
덜어내고 버리고 더 갖지 않기
이곳으로 오기까지 셀 수 없이 이사를 다녔다. 그러면서 짐을 참 많이도 버렸는데, 다음에 또 이사할 때 보면 희한하게 버린 물건들이 다시 나타나 있었다. 버리고 사고 또 버리고 또 사고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물건을 거의 사지 않는다. 사는 것이라곤 대부분 집수리 용품뿐이다. 나는 더는 패션에 관심이 없어 예쁜 옷을 사지 않는다. 속옷이나 티셔츠나 양말 정도만 아주 가끔 사는 정도다.
이전에는 어딘가로 훌쩍 떠날 때를 대비해서 물건을 최소한으로 소유하려고 애썼었다. 지금은 더 작은 공간에 정착하고 싶어서 물건을 덜어내고, 버리고, 더 사지 않으려고 애쓴다. 새로 산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아직도 버려야 할 것들이 계속 나온다. 그러니 버릴 물건이 더 있고, 쓰지 않는데도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더 있어서 아직 내 삶은 덜 간소하다.
내가 욕망하는 것
아무도 나를 들여다볼 수 없는 높은 언덕에 나무로 빽빽하게 울타리를 치고 살고 싶었다. 지금은 동네 뒤편의 나지막한 야산 바로 아래 약간 우묵한 곳에 나무를 드문드문 심고 산다. 내가 욕심내고 소유하고 싶은 단 하나는 아주 넓은 터의 한쪽 편에 고립된 요새 같은 작은 집이다. 이 집에서는 불가능하다. 요새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조금 있다가 설명할 테고, 집이 나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크다. 나는 어딘가에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을 그 집을 갈망한다. 아주 천천히 꿈에 그리는 마지막 집을 만날 준비를 한다. 당장 잡을 수 없는 미련을 물고 늘어지다 보면 어떨 때는 조급해지고 불안해진다. 온전히 버리지 못한 욕망 때문에 여전히 내 삶은 덜 간소하다.
대문 없는 집
지금 내가 사는 촌집에는 대문이 없다. 이 말을 들은 도시 사는 친구들은 그러면 위험하지 않냐고, 자기는 무서워서 절대로 그렇게 못 산다고 호들갑을 떤다. 도시의 내 친구들은 무얼 그리 무서워하는 것일까. 그들은 내가 왜 대문 없이 사는지는 묻지 않았다. 사실 이유는 단순하다. 대문이 달려 있던 바깥채를 철거해서 그렇다.
대문이고 경계고 아무것도 없이 뻥 뚫린 채로 한 반년 넘게 살았다. 그러다 사진에서 차가 세워진 뒤쪽으로 나지막한 화단을 만들어 약간의 경계를 표시했다. 몇 달 더 지난 후에는 차가 세워진 오른쪽으로 한 십 여 미터 길이로 더 높고 더 넓은 화단을 만들어서 나무를 쭉 심었다. 시선을 완전하게 차단하는 기능이 없어 아쉬웠지만, 바깥과 내 집 마당과의 경계가 생기니 안정감이 들었다. 비로소 이 집이 내가 안식할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대문이 없으니 포장된 골목길과 집안의 구분이 필요했다. 잡풀과 물웅덩이로 지저분하던 마당에 잔디를 사다가 깔았다. 그랬더니 누가 봐도 잔디밭은 주인 허락 없이 막 밟고 들어서면 안 될 것 같은 심리적인 경계가 되었다. 백 년 된 촌집은 누추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로써 마당은 어지간한 전원주택 못지않게 아름답게 완성되었다.
원래는 한 이 미터 높이로 담장을 싹 다 쌓아서 나만의 요새를 만들까 했었다. 담장을 높이 쌓고 든든하게 대문을 달아 에밀리 디킨슨처럼 은둔자로 살고 싶었으나 우선은 돈 문제로 포기했다. 담장을 쌓아도 직접 쌓을 작정이었으니 시간이 또 얼마나 걸릴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은둔자로 살기에 적당한 터가 아니었다. 집이 앉은 터가 계단형이라 왼쪽 옆집보다 낮았고, 앞집은 터를 높여 지어서 담장을 아무리 높게 쌓아도 소용이 없을 게 뻔했다. 담장도 없는 집에 대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냥 뚫린 채로 살기로 했다.
고요한 고립
고립을 꿈꾸는 이런 경향은 십수 년 전 갑자기 들이닥친 건강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다른 건강 문제가 더해져 이 삶의 방식을 유지해 나가려 한다. 왁자한 것들에서 멀어지고, 화려한 것들에서 고개를 돌려 피하고, 움직임들이 뒤섞인 소란스러운 곳에서 얼른 벗어나서 고립되는 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다. 이곳 촌에는 도시와는 다른 기계 소음이 예상치 못한 복병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마음 깊이 겨우 가라앉혔던 불안을 다시 휘저어 수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거대한 소음들이. 그래도 풀벌레 소리, 새소리만이 집 주변을 가득 메우는 시간이 더 길어서 내 불안은 다시 낮은 레벨로 내려간다. 소란과 동요는 자극이 없어도 내 속에서도 불쑥불쑥 들끓는다. 안과밖에 어떤 소란도 없는 절대 고요는 불가능한 것일까? 극단의 불안감도 최고조의 행복감도 아닌 그저 그렇고 민숭민숭한 평온함이 내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를 바란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하게 툭 치고 들어오는 불안감 덕분에 오늘도 내가 바라는 최소한의 삶은 멀었다.
간소한 행복
지금은 어떠한 인공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새들도 무더위에 낮잠 자러 갔는지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촌집의 거실에 놓은 널찍한 책상에 앉아 내가 그토록 고생해서 가꾼 마당의 나무와 꽃과 잔디와 햇살을 보며 차가운 커피를 마신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자연과 나 둘만 존재하는 듯한 고요한 고립감에 마음이 벅차 온다. 행복하다.
어느덧 밥 먹을 시간이다. 오랜만에 냉동실에 얼려 놓은 사워도 몇 조각 데워서 마당에서 키운 빨간 토마토를 썰어서 올리고, 역시 마당에서 키우는 바질 이파리 좀 뜯어서 올리고, 올리브기름과 소금 조금 쳐서 먹어야겠다. 토마토와 바질은 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여름에 나는 자주 행복하다. 치킨과 피자와 라면만 번갈아 먹던 내 입맛에 지금은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해가 덜 뜨거워지면 치렁치렁한 내 머리카락처럼 길게 자란 잔디도 깎아야겠다.
나의 잔디 마당과 애지중지 가꾼 나의 나무들.
왼쪽부터, 블루엔젤(그 앞으로 이제 수확을 다 끝낸 토마토 넝쿨, 넝쿨에 가려진 블루애로우), 배롱나무(그 뒤로 2년째 비실비실한 복자기 단풍나무, 프랭키보이(그 뒤로 다 죽어가던 거 겨우 살려 꽃을 본 능소화), 모과나무, 배롱나무, 구상나무, 그 옆에 잘린 애메랄드그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