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라면서 왜 때려?
“몇 사람 탔어요?”
“네 열 사람 탔고요. 군바리 하나 추가요”
버스안내양 시절 군바리는 사람도 아니라며 시시덕거리던 우스갯소리다.
나는 군대 가기 정말 싫었다. 뻥이 70%쯤 섞인 형들의 군대 얘기 영향도 있었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안 가려고 미루고 미루다가 또래들 제대할 나이인 23살에 입대했다. 풍물치고 술 먹는 거 말고는 특별한 재주가 없던 나는 강원도 화천 최전방 부대에 땅개(일반병)로 배치되었다.
“신병! 너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여기까지 끌려왔냐? 가방 끈도 길다며?”
처음 근무를 섰던 GOP 철책 23 소초 7번 근무지와 사수였던 고참의 일성을 아직도 생생하다. 끝없이 이어진 살벌한 철책과 발아래 구름바다 그리고 그 위를 을씨년스럽게 울부짖으며 날던 새까만 까마귀 떼가 주는 첫인상이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GOP 근무는 30여 명이 경계근무 서며 6개월 동안이나 한 소초에서 지낸다. TV와 라디오도 나오지 않으니 동료 군인이 장난감이자 화풀이용이며 간혹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철책 생활은 첫인상만큼이나 힘들고 힘들었다.
윤 이병은 철원에서 농사짓다 입대 한 철책에서 받은 내 직속 6개월 후임이다. 막둥이 윤 이병은 외우는 것에 약했다. 분대원 7명 이름 외우는데 2시간이 걸릴 때부터 암울한 앞길이 예견됐다. 우리 분대는 화기 분대라 개인 소총 이외에 공용화기로 M60(일명 람보 총)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윤 이병에게 100여 개에 달하는 M60 부품 명칭을 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군기 바짝 들어 외우면 보통 한두 시간이면 끝나는데 예상대로 일주일이 지나도 외우지 못했다. 고참들은 나와 내 바로 위 선임을 닦달했다. 나는 외우는 것으로 맞아 본 적이 없었는데 윤 이병 덕에 매타작 당하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미안했는지 고참은 직접 윤 이병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름 하나 틀리는데 한 대씩 어떤 날은 두 대씩 무거운 쇠뭉치를 머리를 두들겨 맞았다. 쇠뭉치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깨져 피가 철철 흘렀다. 문득 탈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고참에게 말했다. “한 달 안에 책임지고 교육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고참은 지쳤는지 순순히 허락했다. 윤 이병은 우리와 편안한 상태로 외우니 일주일도 안돼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우리의 헌신으로 윤 이병은 그렇게 무사히 신병 적응기를 넘겼다.
바짝 마른 체형, 날카로운 눈빛, 무뚝뚝한 충청도 스타일의 억양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나를 공격적인 유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오해일 뿐이다. 내 말투가 좀 세게 들릴지는 몰라도 난 결코 공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온순한 성격에 폭력을 무척 싫어하고 갈등 상황을 피하려는 소심한 성향의 평화주의자에 가깝다. 이렇게 생각하니 난 천상 우주 평화주의자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나는 군생활 동안 고참들에게 많이도 맞았지만 제대할 때까지 윤 이병을 포함 후임병들을 때리지 않았다. 말년에 한 참 후임이 하도 싸가지없이 이죽거려 다리 쪽으로 빗자루를 휘두른 적이 한번 있긴 하다.
소대 매 받이였던 윤 이병은 윤 병장이 되면서 완전히 변했다. 내가 말년 병장 때 소초 뒤편에서는 매일 매 타작 소리가 들렸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가랑잎도 조심하라는 말대로 못 들은 척하다가 참다못해 윤 병장에게 한마디 했다.
“이등병 시절 생각해서 애들 그만 좀 때려라. 너는 나한테 한 대도 안 맞았잖아”
그랬더니 윤 병장이 이죽거리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전 말년은 그냥 제대나 하쇼. 전 병장님이 해놓은 게 뭐가 있다고. 애들 군기나 다 빼놨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내가 안 때려서 소대 전체 군기가 빠졌다는 소리였다.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배신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천불이 났지만 어차피 제대를 두 달 남겨놓은 때라 나는 그냥 속으로 삭이며 비겁한 방관자로 지냈다. 나는 아무 일 없이 제대를 했고 배신당한 군생활은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가끔 윤 병장 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맞아 본 놈이 또 때린다.’
에필로그: 중대 제대 송별 회식 후 마지막 철책 길을 내려오는데 윤 병장이 멀리서 “전 병장님” 하며 뛰어오더니 나를 덥석 안고 울더라. “미안합니다. 전 병장님” 하며 사과했지만 두 달여를 가슴앓이로 보내야 했던 나는 속 좁게도 윤 병장을 받아 주지 못했다. 제대 후 나는 윤 병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농사를 짓겠다던 말이 사실이었다면 윤 병장은 지금 철원 월하리에 살고 있을 게다.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윤 병장 아니 윤 이병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