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컨설턴트로서의 삶
짝꿍도 박사과정 중이었기에 몇 년간 내가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내가 워낙 회사일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퇴사를 하면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퇴사를 고민할 때 월별로 나올 상여금을 엑셀에 입력하고 계산해보며 ‘조금만 더 다니면 보너스를 받을 텐데’ 하면서 결단을 미루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에 퇴사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자 짝꿍은 본인 박사 월급으로도 둘이 먹고사는데 지장 없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분명히 그렇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심적으로 힘들 때 참 든든한 힘이 되는 말이었다.
퇴직금이 얼마나 나올지 계산해보며 허리띠를 졸라매면 어떻게든 살아볼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우리가 창업 멤버로 활동했던 '파크히어(PARK HERE)'서비스가 카카오 그룹에 인수되면서 보유하고 있던 지분에 대한 평가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우리 생계에 큰 보탬이 됐다.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퇴사하고 몇 달간 휴식을 취하며 연구에만 몰입했다. 연기했던 파일럿 프로젝트도 잘 끝냈고, 본격적인 박사 논문 연구를 위한 리서치 프로포절까지 잘 끝냈다. 박사과정 3학년이 시작될 무렵, 모교로부터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외국인 전담 프로그램을 신설했는데, 경영학 관련 강의를 영어로 할 외래 교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교단에서 실무와 이론을 접목시킨 유용한 강의를 하는 것이 인생 목표 중 하나였던 나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였다.
그렇게 2015년 1학기부터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인 2019년까지 나의 경력에 ‘대학 강의’가 추가됐다.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경영학원론, 전략 경영론, 서비스 경영론, 공간 브랜딩, 기업가 정신과 리더십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나에게 강의 제안을 한 교수님은 강의 준비에 너무 힘 빼지 말라며 여러 과목을 맡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정해진 월급이 아닌 강의 시수에 따라 돈을 지급받기 때문에 강의 수를 늘리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이득이었다.
그러나 나의 수업 목표는 2가지였다. '재미있고 유용한 수업', '등록금이 아깝지 않은 수업'. 이를 위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업방식보다 토론식 수업과 실제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는 수업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업 전에 준비할 것도 많고, 개별 과제를 평가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게다가 내 박사 논문도 진행해야 했기에, 한 학기에 한 과목만 맡기로 했다. 부득이하게 학교 측에서 요청이 있는 경우 두 과목까지 맡았다.
처음에 토론식 수업이나 실제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수업을 진행하려고 한다니 강의를 제안한 교수님의 반응은 살짝 부정적이었다. 학생들이 따라오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듯 보였다. 그러나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 나부터도 기억에 남는 수업들은 모두 실제 프로젝트를 하거나 토론을 했던 수업들이다. 또 이런 수업들이 내가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내 시간이 많이 소요되더라도 꼭 해보고 싶었다.
교재 선정부터 학생들이 배운 이론을 접목시킬 수 있는 케이스가 포함된 것으로 선정했다. 그런 교재가 없는 경우는 별도의 케이스를 준비했다. 또 과목 특성에 맞춰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토론 수업이나 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프리라이더(Free-rider) 문제다.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팀 프로젝트는 2-3명이 진행하도록 했다. 또 팀원들이 서로를 평가하도록 하는 360도 다면 평가를 적용했다.
또한, 모든 학생은 수업 전날까지 토론할 내용을 1-2장짜리 에세이로 작성해 제출해야 했다. 나는 학생들이 작성한 내용을 훑어보고 토론할 조를 짰다. 토론 준비를 하지 않은 학생은 감점을 받고 토론에 참여할 수 없다. 토론 시간 중에 그 학생은 에세이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이렇게 진행하니 토론 준비를 해오지 않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매 시간마다 토론 후에는 각 조를 대표하는 학생이 토론한 내용을 정해진 시간(보통 3-5분) 안에 발표하도록 했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대중 앞에서 전달하는 연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처음에는 발표에 자신이 없어서 피하려고 하던 학생들도 학기가 끝날 때쯤에는 자신감을 갖고 조리 있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전략 경영론 수업은 in-class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당시 내가 리브랜딩 컨설팅을 하게 된 회사와 산학협동으로 진행한 것이다. 수업 시간에 전략 경영론의 주요 이론과 브랜딩 전략 이론을 접목시켜 가르쳤고, 진도에 맞춰 수업 시간 중에 학생들이 프로젝트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도했다. 업무 의뢰를 맡긴 회사 자료가 모두 한글로 되어 있어, 11개국에서 온 외국인과 한국인들을 조합해서 조를 이루어 진행했다. 학부 2학년생들의 수업이라 결과물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열심히 잘 수행했다. 학생들의 결과를 취합하고 수정하여 내가 최종 보고서를 제출하고 발표했고, 회사에서도 만족하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공간 브랜딩 수업에서는 브랜딩과 공간 디자인 관련 이론을 가르치고, 진도에 따라 다양한 호텔의 공간 브랜딩 사례를 다루면서 학생들이 이해도를 높일 수 있게 했다. 또 조별 프로젝트는 학생들이 자주 가는 카페나 레스토랑을 선정해서 해당 브랜드 공간의 현황 파악을 하고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토대로 개선점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조별 프로젝트는 자칫하면 미루고 미루다 막바지에 점수를 위해 얼렁뚱땅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학기 중 3번에 걸쳐 중간발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의 모든 수업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됐고, 이에 대한 학생들의 호불호는 물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대충 시간 때우려는 마음으로 내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은 없었다는 점이다. 뭔가를 열심히 해보고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이 신청을 했고, 학생들의 그런 열정이 나에게 전달되어 강의 준비의 원동력이 됐다. 내 강의 평가는 5점 만점에 평균 4.6점이었다. 강의 평가에는 '알찬 수업',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면 들어야 할 수업', '학교에서 가장 유용한 실용적인 강의를 하는 교수', '실무와 이론을 모두 가르치는 교수' 등의 학생들의 추가 코멘트가 달렸고,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일부 학생들은 처음에 수업의 강도가 높아 포기할까도 생각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한 학기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자신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값진 수업이라는 장문의 내용을 적기도 했다. 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학생들은 자기 평생 잊지 못한 수업이었다고 편지를 써주기도 했다. 내가 노력한 만큼 학생들도 알아준다는 생각에 뭉클함과 감동을 느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정말 보람되고 뿌듯한 일이긴 했으나 에너지 소모가 정말 많이 되는 일이었다. 왜 교수가 일정기간 강의를 하고 1년간 안식년을 가져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학생들로부터 받는 에너지도 많긴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지식과 에너지를 다 쏟아내야 하는 직업이다. 나는 한 학기에 1-2과목만 맡았으니 이렇게 온 열정을 다해 불사를 수 있었지, 한 학기에 4-5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면 불가능한 일 아닐까?
학교 강의와 박사 논문을 진행하면서 틈틈이 브랜딩 컨설팅도 진행했다. 너무 무리하면 이도 저도 다 놓칠 수 있으니 무리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실무 감을 잃지 않고 용돈 벌이로 할 수 있는 수준에서. 별도로 영업을 하지 않고 지인들 중 도움이 필요한 작은 업체나 스타트업 위주로 브랜딩 전략을 세우거나 브랜딩 자문을 했다. 이는 호텔 브랜딩 외 다른 분야의 브랜딩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 경험으로 나는 브랜딩의 기본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고, 브랜딩 프로세스와 브랜딩 프레임워크를 만드는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회사를 퇴사하면 어떻게 먹고살지, 무엇을 할 수 있으려나 했던 것은 기우였다. 손에 쥐고 있던 하나를 놓으니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이 경험은 나의 커리어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경험으로 나는 살다 보면 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힘들 때는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여유를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