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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청객 Aug 25. 2022

둘, 해결

변기가 막혔을 땐

해결

제기된 문제를 해명하거나 얽힌 일을 잘 처리함






나는 모범생이었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모범생. 나의 성적 때문에 ‘똑똑하다’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나는 나 자신이 ‘타고난 똑똑이’가 아니라 ‘무던한 노력으로 이뤄낸 똑똑이 코스프레’ 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배운 것만 아는 바보랄까. 그러다 보니 어디에서도 배우지 않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마주했을 때 당황하는 정도가 다른 이들보다 큰 편이다. 임기응변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 전에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독립을 하고 보니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내가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마이너스에 가깝다는 사실에 매일 놀라는 중이다.



아무도 알고 싶지 않은 정보겠지만 나의 휴지 소비 능력은 가히 가공할 만하다. (생각해보니, 이것만큼은 학교에서의 배움을 따르지 않았다.) ‘휴지는  칸까지만이라는 말이 마치 수학 공식처럼 떠돌았지만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휴지를 많이 써서  부모님께 혼이 나곤 했다. 돈을 낭비하는 것도 아니고 휴지를 낭비하는 것이  그리  잘못인가 싶어 반항하는 마음으로 나날이 휴지를  많이 썼다. 하지만  독립을 하고, 하나의 사건을 겪으면서 휴지를 많이 쓰는 것이  죄악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립 이틀 째. (여기부터는 식전이나 식후에는 읽는 것을 금지하는 바이다)






출근 전 여느 때처럼 화장실에서 용변을 본 후 지나칠 정도로 낭비한 휴지를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렸다. 변기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변기 뚜껑을 열어보니 물이 제대로 내려가지 않았다. 다시 물을 내렸다. 변기의 물은 내려가기는커녕 더 가득 차올랐다. 무슨 자신감인지 변기 옆에 있던 뚫어뻥으로 변기를 뚫어보려고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나. 잘 모르면 네이버 선생님에게 도움이라도 구할 것이지. 몇 번의 뚫어뻥질 이후 다시 물을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상세한 묘사를 할 수 없지만 말 그대로 화장실은 난리가 났다. 변기는 모든 것을 토해버렸고 나의 정신은 가출해버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그제야 변기 막혔을 때의 대처법을 찾아봤다. 제각기 다른 방법들을 다양하게 안내하고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금기시하는 행동 하나가 있었다.



‘절대로 변기 물을 자꾸 내리지 마세요’



하지 말라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했으니 환장의 파티가 열린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임기응변이라고는 없는 나라는 인간이 그때 한 행동은 ‘아빠에게 전화하기’였다. 아빠가 옆집에 사는 게 아니니, 아빠가 이 상황을 같이 해결해 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독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금 반추해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세상의 종말을 본 것처럼 한껏 당황하고 격양된 나의 목소리와는 달리 아빠는 차분했다. 그럴 수도 있다면서 변기가 넘쳐버렸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관리팀에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집 나간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변기 뚜껑을 덮어두고 같이 사는 룸메에게 급히 문자를 했다. 와중에도 출근은 해야 했으니 대충 상황을 수습하고 급히 챙겨 기숙사를 나왔다. 출근길에는 관리팀에 전화를 해서 변기 수리를 요청했다. 회사에 있는 중에도 변기가 토악질을 하던 장면이 자꾸 아른거려서 밥맛은 뚝 떨어졌고 혹시라도 대규모 화장실 공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라는 극단적인 상상까지 했다. 퇴근 후 기숙사에 돌아와서 변기 뚜껑을 열어볼 때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떨렸다. 다행히 변기는 무사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지만 집을 나간 정신의 나머지 절반은 돌아오지 않아서 변기 물을 내릴 때마다 한동안은 바짝 긴장했다. (이런 사건을 겪고도 휴지는 여전히 많이 쓴다. 휴지를 변기에 버리지 않기 위해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하나 구비했을 뿐. 인간은 이렇게 영원히 고쳐 쓸 수 없다.)



지금은 이 이야기가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올릴 만한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나는 변기가 막혔을 때 내 인생도 그대로 막혀버리는 줄 알았다. 물론 변기가 막혔을 때 당황할 수는 있지만 문제를 만들었다면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데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만 했다. 하루아침에 나의 이런 의존적인 성격이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변기가 막혔다는 사실을 관리 팀보다 아빠에게 먼저 알리는 사람은 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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