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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요 Sep 20. 2023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영인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작년 이맘때 즈음 건형씨에게 ‘생각다방 산책극장’ 글 모음 연락을 받고 반드시 보내겠다고 대답한 이후 일년이 지나 히요에게 다시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또 다시 마감을 넘기고 오늘! 오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신기한 게, 매일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어떻게 글을 시작할까 떠올려 보던 나날이 이어지던 중에 상욱씨에게 연락이 왔다. 상욱씨와는 아마도 2012년 이후 처음 연락하는 것이리라. 작년 히요 결혼식 때 잠깐 인사는 했지만. 일 때문에 제주도에 몇 달간 내려와 있다고 했다. 그렇게 근 6년 만에 다시 이 곳, 강정마을에서 만나 막걸리를 나눌 수 있었다. 마침 나는 곧 강정을, 제주를 떠난다. 처음 강정에 왔던 해에도 상욱씨와 막걸리를 나누었고 떠나는 해에도 막걸리를 나누었다. 대략 7년 꼼짝 않고 시간을 보낸 강정에서. 게다가 며칠 전, 이내도 제주에서 만났다. 이내는 이제 글쓰는 작가가 되어 내 친구가 운영하는 서점에 북콘서트를 하러 내려왔었다. 우리는 같이 비자림로 확장공사 반대 문화제에 갔고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개발과 자본의 망령에 홀린 사람들과 마주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깜깜한 숲에 옹기종기 조촐하게 둘러 앉아 반딧불이와 함께 이내(와 선경)의 노래를 듣고 치유 받을 수 있었다. 바로 며칠 후, 무명서점의 북콘서트에서 이내의 노래를 다시 들었다. 몇 번을 들어도, 언제 들어도, 이내의 솔직하고 떨리는 목소리는 깊은 감동을 준다. 


 히요는 예상치도 못하게 결혼을 하고 뭔가 이것저것 계속 새롭고 재미난 시도들을 이어가며 잘 지내는 것 같다. 제주도에 살고 귤 농장에서 일하던 나에게 선물이라고 귤잼을 보내주었다.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항상 눈에 선하다. 은수언니가 언젠가 주고 간 무화과잼도 정말 맛나게 먹었었지! 소혜언니는 홍성에서 재미나게 지낸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무려 집까지 지었다고! 따로 연락을 주고 받지않아도 소혜언니라면 어디서든 잘 지낼거라는 생각이 든다. 건형씨도 결혼을 했고, 고짱도, 소라씨도 결혼을 했다. 창아쌤은 여전히 싸우고 있을까. 혜정언니는 소식을 몰라 궁금하구나. 낙타깡의 감자는 여전히 맛있을까. 낙타깡 민사장에게는 나의 고양이 미아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 책정리를 하며 은진언니의 책도 발견하고, 봄눈별의 책도 발견하고, 생각산책도 발견했다. 봄이랑 레코드의 스티커를 보며 CD를 컴퓨터에 옮겨 넣었다. 지나간 시간들이지만, 현재 진행형이구나 싶다. 시간은 단절없이 이어지고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들이 하나 둘 쌓여서 지금으로 계속 연결되고 있구나. 앞으로도 그렇겠구나. 


 워낙 주변에 무심하고 게으른 사람이라 ‘기억’능력이 아주 현저히 떨어진다. 생각다방 산책극장이 워낙에 친숙한 존재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실제로 부산에서 지내면서 생각다방과 함께 한 시간은 (아마도)채 6개월이 안된다. 그 밀도있게 꽉꽉 채운 시간이 2011년의 어떤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 내 몸속 어딘가 자리하고 있다. 처음 다방을 찾았던 날은, 처참한 기억력의 소유자임에도 그 이미지가 남아있다. 현실적으로 잘 추정해보면 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왠지 나는 이제껏 늘 그 첫 날을 여름의 어딘가 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날을 떠올리면 성격에 맞지 않게 ‘운명’이니 ‘필연’이니 하는 단어들이 동동거리기도 한다. 부산에 온 지 얼마 안돼서 아는 사람도 없던 그 때, 무작정 홀케이크를 들고 찾아갔었지. 일하던 베이커리에서 남은 케익을 챙겨왔는데 혼자 먹기는 많아서 나누어 먹자고. 대연동 그 초창기 생각다방의 현관문 안 쪽에서 나를 맞이하던 히요의 얼굴, 식탁인지 책상인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이내, 열린 창문턱에 기대어 살랑살랑 바람을 느끼며 책장을 넘겼다. (아마도)당시엔 뽈이 홀로 나를 반겨주었지. 언젠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곧 봄이가 다방에 왔다. 상욱씨가 엄청 편애했었지, 봄이를. 까만 뽈이, 노란 봄이는 그후로 늘 나의 사랑이었다. 


 이듬해 봄, 뭔가에 홀린 듯 강정으로 떠난 후에도 가끔씩 꼭 생각다방에 갔다. 부산에 친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년에 육지 나가는 일이 몇 번 안되면서도 몇 년간은 한 번씩 꼭 갔던 것 같다. 친구들이 있을 때도 있었고, 친구들이 없을 때는 뽈이와 봄이가 나를 반기고 나는 그들의 똥을 치우고 밥을 주기도 했다. 나에겐 대연동의 생각다방이 가장 강렬한 기억인데 그 후 다방은 칠산동으로 이사했다가 칠산동 시즌도 마무리하고 친구들은 동대신동 인근으로 이사하며 ‘생각다방’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공간의 실험과 관계의 실험과 각종 재미나고 의미있는 작당들이 이어진 ‘생각다방 산책극장’은, 공간이라고 하기에도, 관계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뭐라고 규정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지는 존재. 생각다방을 만났기에 나는 강정에도 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강정에서의 시간을 견뎌내는 데에(견딘다는 표현은 조금 망설여지지만, 아무튼 그랬다) 힘이 되었다. 그 시간과 공간과 존재들과 관계들이. 긍정의 힘,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생각다방은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까. 강정에서 한없이 괴롭고 힘들고 그 어떤 빛도 느낄 수 없는 그 시간들 속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여비를 마련하여 생각다방으로 향했던 것은. 그 위로의 힘을 받고 싶어서. 


 관계는 복잡하고 계속 변한다. 하지만 생각다방은, 적어도 나의 생각다방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글재주도 없고 어쩌다보니 혼자 끄적거리는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다방과 생각다방의 모든 관계(공간, 시간, 분위기, 사람, 동물, 책, 영화, 색종이…)에 꼭, 내가 꼭 전하고 싶은 것은 ‘고마움’.



고맙습니다. 생각다방 산책극장.

그렇게 나타나 주어서,

나와 만나 주어서,

함께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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