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소울푸드, 초리판 샌드위치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2

by 쏭작가




언덕에서 호수로 이어지는 길. 바릴로체 어느 곳에서든 밑으로 내려가면 호수가 나온다. 옆엔 플리마켓이 열려 있다.



야심차게 바릴로체 산책을 나선 우리. 어디로 갈까 정하기도 전에, 맛있는 냄새가 솔솔 우리의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마법에 이끌리듯 냄새를 따라가 보니, 길게 줄이 늘어선 사람들이 보였다. 공원 앞에서 초리판 샌드위치를 파는 곳이었다. 어느새 우리도 그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 초리판(Choripan)은 소시지란 뜻의 ‘chorizo’와 빵이란 뜻의 ‘pan’의 합성어인데, 말 그대로 빵 사이에 구운 소시지를 넣은 샌드위치를 말한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쉽고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이기도 하다. 길게 늘어선 줄 뒤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초리판의 기다림이 시작된 것이다. 오랜만에 줄을 서서 길거리 음식을 기다리다 보니, 자연스레 옛 생각이 떠올랐다. (라떼는 말이야...)






초딩시절, 학교 앞 골목길엔 무려 5개의 문방구가 있었다. 한 200미터 남짓한 그 짧은 골목길에 문방구가 5개라니! 요즘 초등학교 앞엔 문방구의 '문방'자도 찾아볼 수 없는 골목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딩들의 성지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집에 가는 방향이 아닌데도 무조건 그 골목을 지났다. 지나기만 했나?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어서 2~3군데 문방구는 꼭 들렀다.


문방구가 5개나 됐지만, 희한하게도 모두 다른 '맛집'이었다. 첫 번째 문방구는 아직도 이름이 생각난다. 대성 문방구. 인상이 푸근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인이셨다. 이 문방구는 '숏다리'와 '자두' 맛집이었다. '숏다리'는 초딩 손바닥 만 한 작은 오징어 다리였는데 이걸 휴대옹 버너에 살짝 구워서 준다. 이게 어찌나 맛있었던지! 그리고 여름이면 자두를 한 알씩 팔았는데 한 알에 100원이었던 것 같다. 이때 사 먹은 새빨갛고 물컹한 자두가 달기로는 내 평생의 모든 자두를 다 비교해봐도 단연 일등이다. 이것 역시 '추억이라는 조미료'가 기억 속에 뿌려진 탓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내 평생 빨갛게 잘 익은 자두를 맛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기억이다.

두 번째 문방구는 떡볶이와 핫한 튀김집이었다. 특히 이곳에선 핫도그를 팔았는데, 갓 튀긴 핫도그를 꺼내 주인아주머니가 '설탕? 케찹?' 하고 물어보면 '둘 다요'라고 말하는 게 그 당시 국룰이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10세 인생을 살고 있던 나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핫도그를 먹으면 성인병에 걸려서 죽는 줄 알았다(할아버지가 '죽는다'라고 까진 안 하셨지만, 상상 속에서 성인병은 죽는 병인 줄 알았다). 이 때문인지 지금도 핫도그를 좋아하지만 잘 먹지 않는다.

세 번째 문방구는 윌리웡카 뺨치는 사탕과 초콜릿 천국이었다. 50원에서 100원을 내면 사탕이나 초콜릿 하나를 살 수 있었는데, 이때 나의 최애는 자두만 한 크기의 사탕처럼 포장되어 있는 초콜릿이었다. 커다란 홈런볼 같은 느낌인데 페레로로쉐처럼 안에 진득한 초콜릿이 들어 있는, 그 금단의 열매 같은 그 초콜릿 과자를 엄청 좋아했다. 이름은 bon o bon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봉봉이라 불렀던 그것. 그런데 세상에!!! 이걸 아르헨티나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알고 보니 bon bon은 아르헨티나 과자였다. (와! 이때부터 나는 아르헨티나에 올 운명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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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과자회사 Arcor(아르코)에서 1984년부터 만든 bon o bon 초콜릿. 페레로로쉐와 비슷한 맛이다. *사진출처: www.arcor.com


네 번째 문방구는 껌 맛집이었다. 껌도 맛집인가? 싶은데, 이곳에서는 껌 속에 아주 작은 만화책이 들어 있는 껌을 팔았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만화책도 나름의 시리즈가 있었는데, 껌 한 통을 다 씹기도 전에 다음 시리즈가 궁금해서 더 많이 껌을 씹었던 생각이 난다.

마지막. 대망의 다섯 번째 문방구는... 사실 문방구는 아니고, 길거리 가판대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선 '무엇이든 다 튀겨' 팔았는데, 쫀득이도 튀겨 팔고, 오징어도 튀겨 팔고, 쥐포도 튀겨 팔고, 아무렴 튀길 수 있는 건 다 튀겨서 파는 곳이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 이 중에 딱 한 가지만 먹을 수 있다고 하면, 나는 이 리어카로 가서 '쫄쫄이 하나요'라고 말할 것이다. 연필처럼 겉은 노랗고 안에 분홍색 심(?) 같은 게 들어 있는 것들이 나란히 붙어서 쫀드기의 형태를 하고 있는 건데, 튀긴 다음 결대로 하나씩 뜯어먹으면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아마 불량 기름에 튀긴 불량 식품이라 지금 다시 본다면 나 역시 먹기를 망설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그 시절로 타임슬립 해서 딱 한 번이라도 다시 한번만 먹어 보고 싶다. 내 인생 최고의 길거리 음식이었다.


요즘 초등학교 앞에는 무엇이 있나. 문방구가 없으면 아이들은 장난감을 어디서 사나? 참새가 방앗간 들린다는 속담도 잘 모르겠다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초등학교 앞에 맛있는 떡볶이 집 하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






냄새에 이끌려 운명처럼 만난 초리판 샌드위치



30분을 기다려 드디어 우리의 주문 차례가 되었다. 주인은 우리를 보더니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우리에게는 다른 메뉴판을 건넸다. 받아 보니, 한 잡지에 실린 그곳의 기사였다. 세상에! 이미 오래전에 소개된 듯, 코팅이 된 종이 위로 거뭇거뭇한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가장 단순한 것은 초리판(choripan).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그릴에 구운 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추라스꼬(Churrasco). 역시 우리는 고기지! 추라스꼬를 두 개 주문했더니, 두툼한 소고기가 그릴 위로 턱- 턱- 올라간다.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공원 가득 퍼지는 향 때문에 정신이 아득했다. 어느새 우리 뒤로도 줄이 길게 늘어섰다.



우리나라 잡지에 실린 초리판 가게 기사. 한국인이라 하니 메뉴판 대신 이걸 보여주셨다.
장인정신으로 열심히 만드시던 초리판 아저씨.




드디어 완성된 추라스꼬가 나왔다. 그전에 사람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자연스럽게 잔디밭으로 내려와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입 베어 문 추라스꼬의 맛은 좋았다. 잔디밭에 앉은 사람들 곁을 떠돌던 개들이 우리 곁에 와 앉아 침을 뚝뚝 흘려댔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애써 눈빛을 피하고 추라스꼬를 먹었다. 고기가 조금 질겼다. 우리가 조금 운이 없었는지, 원래 고기가 그렇게 질긴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푸짐한 양도 양이거니와, 씹어도 씹어도 씹히지 않는 힘줄 때문에 더 이상 먹기가 힘들어 조금 남았다. 여전히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개들에게 남은 샌드위치를 나눠주었다. 힘이 좋은 개들은 고기를 몇 번 씹더니, 꿀떡 삼켰다.

우리도 좋고, 개들도 좋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



추라스꼬 샌드위치. 다음엔 그냥 초리판 샌드위치를 사 먹어야 겠... :)
아르헨티나의 떠돌이 개들. 개를 좋아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 개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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