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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작가 Aug 11. 2021

산텔모 선데이 마켓엔 아티스트들이 산다

Welcome to BUENOS AIRES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일요일마다 열리는 san telmo 일요시장 



  우수아이아에서 곧장 이과수로 날아가지 않고, 굳이 비행기 표를 하나 더 사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건, 바로 이 산텔모 일요시장 때문이었다. 일요일에만 열리는 산텔모 시장! 마켓덕후인 내가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이곳에서 꼭 사야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고, 이곳에 가야만하는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오랫동안 이 시장 한가운데에서 탱고를 추는 늙은 댄서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여행 가이드북 어디에나 나오는 바로 그 할아버지 말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그 할아버지만큼 유명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그 할아버지가 추는 탱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시장에 가야하는 이유는 충분했으나, 나에게는 그냥 ‘일요일에 열리는 시장’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꼭 가고 싶었다. 시장엔 언제나 뜻밖의 기쁨이 숨겨져 있으니까. 





Radio Taxi를 타고 산텔모 일요시장으로 가는 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해서 호텔에 짐을 놓자마자 곧장 택시를 타고 산텔모 시장으로 향했다. 오후 5시면 시장이 끝나는데, 시간은 벌써 두시 반이 넘어가는 중이었다. 택시 기사는 산텔모 시장 어디에서 내려줄까 하고 되물었다. 아무래도 입구가 여러 방면으로 나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시장이니까. 하지만 어디에서 내려야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서 우물쭈물하자, 가장 괜찮은 골목에 내려주겠다며 택시를 몰았다. 나쁜 사람만 아니라면, 여행지에서 가장 믿을만한 여행 가이드는 바로 택시 기사님들이다. 




산텔모 시장 입구
호기롭게 들어가 본다. 산텔모를 다 살 기세로! :) 



  택시는 어느 골목 입구 앞에 다다랐다. 다음 골목부터는 차량출입이 통제된 곳이었다. 택시 기사님은 이곳으로 곧장 들어가면 된다고 알려주며 그곳에 내려주었다. 택시가 떠나고, 우리는 잠시 긴장을 했다. 좁고 사람이 많은 시장 골목길. 언제 어디서 소매치기를 당할지 모른다. 각자 오래된 필름카메라 하나씩만 손에 쥐고 모든 것은 가방에 꽁꽁 숨겨 넣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우리는 산텔모 시장으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길에 마켓 부스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파는 것들도 다양했다. 가죽가방, 식탁보, 마그넷, 옷, LP판... 부스 하나하나 모두 멋졌다. 우리는 얼마 못 가,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 한 분이 계신 부스 앞에 멈춰 섰다. 할머니는 마테 차를 마실 때 쓰는 빨대를 팔고 계셨다. 스틸로 된 빨대에 섬세한 문양이 들어간 것이었다. 마테 차 빨대는 특이하게 빨대 끝에 거름망이 달려 있고, 입을 대는 부분은 납작하게 구멍이 작은 것이 특징이다. 왠지 할머니가 파는 빨대로 마테 차를 마시면 더 맛있을 것 같은 기분에 빨대 두 개를 샀다. 







BuenosToursSan Pedro Gonzalez Telmo Church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성당에 들어가면 차분한 경건함에 알 수 없는 눈물이 난다 


  그렇게 물건을 사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성당이 하나 나왔다. 산 텔모와 같은 이름을 가진 성당. 뱃사람의 수호신인 성 베드로의 이름을 딴 ‘산 페드로 곤잘레스 텔모’ 성당. 산 텔모 만큼 유서 깊은 성당이었다. 


  산 텔모 지역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이다. 17세기부터 공장이 발달한 이 지역엔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1800년대에 주거지와 상가 건물, 산텔모 시장이 세워지면서 이곳은 도시로 발돋움했고 사람들은 부를 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871년 이 지역에 황열병이 덮치면서 만여 명 이상이 숨졌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이후 19세기 말, 아르헨티나 정부가 인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이민정책을 펼치면서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 이민자들이 산 텔모에 터를 잡았다. 이후 산 텔모 골목에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생겨났고, 유럽의 문화와 예술을 동경하는 아르헨티나의 예술가들이 흘러들어오면서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의 예술가들. 나이를 불문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산텔모 선데이 마켓
그의 수줍은 인사가 영원으로 남았다 :)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마리오네뜨 공연!





  시장 골목을 이루고 있는 건물들 1층에는 오래된 골동품 가게들이 많다. 1800년대, 산 텔모가 부를 누리던 시절에 이곳에 흘러들어왔을, 비싸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파는 곳이었다. 이 물건들을 쓰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떠나고 이렇게 아름답고 무용한 물건들만 남은 것일까. 산 텔모 시장에서 골동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전부 관광객 뿐. 먹고 사는 것이 하루하루 버거운 이들, 화폐가치가 하루하루 달라지는 이들에게 남겨진 골동품들은 먼지를 먹어갈 뿐이다. 






산텔모 일요시장의 상징적인 탱고 할아버지 



  조금 더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작은 광장 같은 곳에서 탱고가 흘렀다.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서 탱고 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그 분이었다. 가이드 북에서 산 텔모 시장이 나올 때마다 얼굴이 나오던 할아버지. 언제나, 늘 멋지게, 그곳에서 탱고를 추고 있는 할아버지. 오늘도 어김없이 할아버지는 탱고를 추고 계셨다. 


  싱글침대만한 크기의 합판을 위를 무대로, 할아버지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우아하게, 가볍게, 나른하게 스탭을 밟았다. 기타연주자의 손끝에서 라이브로 탱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흐르는 음악 위를 유영하듯 춤을 췄다. 할아버지의 춤사위에 흠뻑 빠져 넋을 놓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느 누구나, 이 탱고 쇼를 보게 된다면 절대로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정신없이 탱고 쇼에 빠져 있을 무렵, 사람들 틈에서 아주 좋은 DSLR 카메라를 든 배낭여행객 한 명이 튀어나왔다. 탱고를 추고 있는 할아버지를 찍기를 여러 번. 저러면 위험한데, 누군가 나타나서 그 카메라를 낚아채 갈지도 모르는데. 불안한 건 나뿐이었다. 탱고를 추고 있는 사람들도, 구경하는 사람들도, 사진을 찍는 사람도 모두 탱고에 빠져 있는 오후. 괜히 호텔에 놔두고 온 디카가 아쉬워졌다. 어쩌면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극도의 긴장감을 끌어안고 있기 보다는 아주 조금은 안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진짜 멋진 탱고음악을 들려주던 기타리스트. 그의 앨범을 사오는 건데. 왜 사오지 않았을까.






즉석 착즙 100% 리얼 오렌지 주스
지나치지 못하고 주문해버렸다. 오렌지 3개가 통째로 착즙되었다. 
오렌지는 왜 이렇게 또 단 걸까. 꿀맛 오렌지 주스!
통째로 가져오고 싶었던 츄러스 바구니






  산 텔모 시장 이곳저곳을 걷다 신기한 물건을 파는 천막을 발견했다. 음료수 캔을 오려 만든 피규어를 파는 상점이었다. 오토바이나 군인 같은 피규어를 파는 곳이었다. 오빠는 그곳에서 납으로 만든 작은 피규어를 사고 싶어 했다. 하나에 50페소라는 피규어. 우리나라 돈으로는 4천원 정도. 혹시 몰라 2개에 80은 안 되겠냐고 흥정을 시도했다. 그는 안 된다고 하더니, 갑자기 보스를 소개했다. 


  "이 사람이 우리 보스야."


  그러고는 아르헨티나 말로 무어라 무어라 말했다. 티는 안 냈지만 나는 속으로 긴장했다. 뭐지? 이 분위기는. 보스는 갑자기 무언가를 달라고 했다. 그는 보스에게 담뱃갑을 건넸다. 아, 망했다. 그냥 100페소 줄 걸.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그냥 오빠를 끌고 갈까 고민하는데, 그가 담뱃갑을 열어 오빠가 고른 피규어를 담았다. 그러더니,


  "80, OK!"


  라고 말했다. 돈을 건네고 긴장이 풀려서 얼른 잔돈을 챙겨 넣는데 다시 그가 묻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오늘이 처음이야?"

  "응."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해버렸는데, 


"Welcome to Buenos Aires!"


  그리고는 환하게 웃는 그. 4일 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여행하는 날은 오늘이 첫 날인 셈이니까, 그래 오늘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첫 날이라고 생각하자, 싶었다. 고마움과 긴장이 뒤섞여 어색하게 웃으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다시 광장에 나오니, ‘웰컴 투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외쳐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와서 처음 들은 환영인사였다. 그 순간, 왠지 진짜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환영받은 느낌이 들었다. 으레, 어쩌면 형식일지도 모르는 그 환영인사가 마음에 따뜻하게 퍼졌다. 






산텔모 마켓에서 만난 찰리 채플린



길을 걷다 고개를 돌리니 문득, 그곳에 찰리채플린이 나타났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친 찰리채플린은 엉뚱한 표정을 짓더니 분주히 지나갔다. 

뜻밖의 찰리 채플린에 꺄르르 웃고 지나쳤다. 

광장을 한바퀴 돌다 또 다시 어느 가게 앞에 서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알아 본 그가 수줍게 인사의 눈빛을 건네고, 

나도 그에게 인사의 눈빛을 건넨다. 

그리곤 다시 꺄르르. 


무얼하는 사람인지

왜 일요일에 이곳에서 찰리 채플린으로 살아가는지 

혹은 관광객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몇 달러의 팁을 달라는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로 인해 산 텔모 시장이 조금 더 사랑스러운 곳이 된다는 것. 

인사의 눈빛이 따뜻했다는 것. 






저는 아티스트고, 이것들은 제 작품이에요



"혹시 조금 깎아주실 수 있나요?"

"아니요, 그렇게는 안 팝니다. 저는 아티스트고, 이것들은 제 작품이에요."


그의 작품이라는 유리풍경들이 바람에 흔들려 음을 만들어냈다.

영롱한 음들을 듣고 지나칠 수가 없어 발걸음이 멈췄던 곳. 

흥정을 거부하는 그의 단호한 대처가, 

자신이 만든 풍경들을 자식처럼 살펴보는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값을 뭉텅뭉텅 깎아주거나, 흥정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 따라 다른 값에 파는 상인보다는

단호하게 흥정을 거부하는 그의 태도에 왠지 믿음이 갔다.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소개하는 그의 자부심을 흥정하고 싶진 않았다. 

제 값을 주고 풍경 하나를 샀다. 

아르헨티나를 닮아 푸르고 흰 풍경이었다. 


이번엔 100% 리얼 레모네이드! 해맑게 V를 해 주다니, 사랑스런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 :) 





나의 destiny 크레페 언니



시장 끝 골목에서 크레페를 파는 언니의 미모에 반해 가던 걸음을 멈췄다. 

시장에서 크레페를 팔기에는 너무나 고운 얼굴.  

언니의 옆에 선 남자는 사장인지, 남편인지 팔짱을 낀 채 훈수만 두고 있었다. 

조그만 꼬마 손님이 먼저, 그 다음이 우리였다. 

언니의 손목 스냅을 따라 둥근 판에 반죽물이 스윽- 스윽- 펴졌다. 

금새 동그란 크레페 옷 하나가 만들어졌다. 


우리 차례의 크레페가 만들어지는 동안, 해가 빠르게 저물어갔다. 

크레페 가게 맞은편에서는 건물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리는 모양이었다. 

디제잉 소리와 바비큐 연기가 뒤섞여 골목을 가득 채웠다. 

어디에선가 젊은 사람들이 골목으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반갑게 친구들 품으로 뛰어들었다. 


크레페를 받아들고 산 텔모 시장을 빠져나왔다. 

사방은 완전히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 

어쩐지 무서운 마음에 발길을 돌렸지만, 

그곳 사람들의 산 텔모는 지금부터가 아닐까. 



산 텔모의 진짜 밤은 이제 시작이다.
안녕, 산 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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