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신춘문예 소설당선 도전기
07 - 직장 11년 차에 뒤를 돌아보다-문순태 소설가와의 만남
유니텔 문학동호회의 소설동인이 된 후 [21세기에 바친다]라는 동인집을 냈다. [종이돈 하나만 주시오]가 실렸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했다. 간간히 쓰던 일기도 쓰는 간격이 늘더니 해가 바뀌어도 단 한 장의 일기도 쓰지 않는 세월이 흘러갔다. 소설의 열정은 사그라들었고 기획서와 세일즈 제안서를 쓰는 일에 더 익숙해졌다. 상상의 언어가 멀어지고 현실의 언어가 나를 지배했다.
일머리가 터진 대가인지 대리와 과장을 거쳐 차장승진을 눈앞에 둔 11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그동안 서울과 광주, 순천, 제주를 돌며 근무했다. 그 지역에서 적응할 만하면 다른 부임지로 떠나는 것이 반복되었다. 잦은 발령은 금융회사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30대 10년이 그렇게 지나갔다.
딸, 아들, 딸 2녀 1남의 자녀가 태어났고, 전세에서 자가로 집이 바뀌었다. 차장 승진을 앞둔 즈음, 업무에 몰입할 때마다 머리가 아파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자잘한 두통에 시달렸지만 참을만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뒷목에서 올라온 통증이 뒤통수를 넘어 정수리를 쪼더니 이윽고는 편두통까지 온 머리를 점령했다. 자고 일어나면 반복되는 통증을 나는 애써 견뎌보려고 했다. 과장 3년 차, 그 해에 평균인 B+ 정도만 고과를 받아도 차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차장으로 승진하면 스텝근무로 옮겼다가 부장을 거쳐 임원까지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배들의 커리어를 보면서 나름대로 그림을 그렸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안정되게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삶을 꿈꿨다. 스스로도 이만하면 잘 사는 것이라고 다독이며 나를 독려했다.
도저히 두통을 견딜 수 없어지자 나는 신경외과를 찾아갔다.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어긋나서 발생하는 통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보통의 경우 사람의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은 4:6 정도를 유지하는데, 내 경우는 교감신경이 7, 부교감신경이 3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작용하여 두통이 생기는 거라고 했다. 좀 쉬거나 마음을 편히 가지면 원래대로 신경이 돌아오는데, 내 경우는 너무 두 신경이 크게 어긋나 쉬어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나는 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 돌아올 수도 없는 어디 먼 곳으로 떠나 길을 잃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고 했는데, 돌아올 곳을 너무 멀리 떠나 경계 밖에서 헤매는 상황이라니...... 단순한 두통이 아니라 어떤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2주 정도 약을 처방받아 복용했다. 신기하게도 약을 먹은 지 이틀이 지나자 두통이 가라앉았다. 문제는 그다음에 터졌다. 내가 맡았던 점포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망사건이 터졌다. 나의 동분서주에도 불구하고 점포는 폐쇄 수준에 이르렀다. 무난했던 근무평점은 속절없이 추락했다. 나는 당연히 승진에서 누락되고, 한직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다시 두통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약을 먹어도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듯 그해 여름, 나는 한 번도 내지 않았던 2 주일의 장기 휴가를 내고 몽골로 떠났다. 대 초원에서 말을 타다가 칭기즈칸이 태무진이던 시절 말을 달렸던 강가 언덕에서 문득 결심을 했다. 직장을 그만 두자.
휴가에서 돌아와 나는 정말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퇴직 후 한 달 동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도 자도 잠은 쏟아졌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서 돌아올 때쯤 잠에서 깼다. 저녁을 먹고 나면 또 잠이 왔다. 직장인일 때 잠을 한 번도 자지 않은 사람처럼 나는 한 달 내내 잠을 자고, 자고 또 잤다.
그러다 인터넷기사에서 문순태 소설가의 무료소설대학 모집 기사를 우연히 보았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에서 은퇴한 문순태 소설가가 고향 담양 남면 생오지에서 문예창작대학을 열고 무료로 강좌를 한다는 기사였다. 모집 날짜를 보니 그날은 이미 모집일이 하루 지난날이었다. 나는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문순태 소설가께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하루가 지났지만 저 그 소설대학에 꼭 들어가야 합니다. 도와주세요.”
나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교수님께서 써 놓은 작품이 있다면 이메일로 한번 보내보라고 했다. 나는 바로 [종이돈 하나만 주시오]의 파일을 부랴부랴 찾아 메일을 보냈다. 다음날 문교수님으로부터 메일 답신이 왔다.
“평범하고 낡은 소재지만 뚝심 있게 주제를 밀고 가는 힘이 있어서 함께 공부해도 좋겠습니다. 소설대학에 오시죠.”
전혀 예상치 않았던 만남이 그렇게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문순태 소설가의 소설 ‘성자를 찾아서’를 나는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TV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걸어서 하늘까지’의 원작자가 문순태 소설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이름만으로도 내 안에서 창작의 뮤즈가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멀리멀리 돌아 다시 제자리를 찾아온 느낌이라고 할까. 첫 수업에 참석해서 나는 주저리주저리 정리 되지 않는 나의 이야기를 길게도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덧붙인 말은 이랬다.
“저!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어긋나 발생한 두통이 내가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멀리 와버렸다고 자각하게 했다면, 문순태 생오지문예창작대학은 내가 다시 나를 나답게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돌아왔음을 깨닫게 했다.
문순태 소설가의 생오지문예창작대학에서 매주 토요일에 2시간씩 강의를 들었다. 광주에서 담양 남면에 있는 생오지까지 차를 운전하는 시간은 약 50분!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머리는 맑았고, 쓰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이 자꾸 말을 걸었다. 상상의 언어가 다시 살아났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함께 공부하는 문우들의 습작품을 읽고 합평하는 시간도 내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지성과 감성이 솟구치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직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을 돕는 자본주의의 첨병 증권회사였다. 전 직장 삼성생명에서 주식에 투자하는 변액보험을 만들고 전파하는 강의를 했던 나로서는 경력을 인정받아 입사할 수 있는 회사였다. 다만 나는 더 이상 회사의 부품처럼 소모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정규직을 마다하고 계약직을 선택했다. 마음속에는 어서 빨리 소설을 써서 등단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문교수님의 강의는 명료하고 흥미로웠다. 가장 기억에 각인되는 이야기는 ‘쓰고 있는 한 작가’라는 말이었다. 아무리 많이 생각하고, 읽고, 공부하더라도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 일단 써라. 쓰다 보면 길이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야말로 이게 소설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쓰기 시작했다. 스티븐 킹의 말처럼 초고는 쓰레기 같은 것이었지만 다시 읽고 다시 쓰고, 또 보고 다시 쓰는 과정에서 소설은 스스로 살아서 제가 길을 내며 완성도를 높여갔다. 물론 내가 보는 관점에서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것이지 객관적인 평가에선 여전히 아마추어의 냄새가 풀풀 났다.
그렇게 쓰는 과정에서 건져 올린 소설이 [킹]이었다. 이 소설은 때로 [물어라 쉭]이라는 제목으로 변경되는 두 가지 버전을 가진 소설이 되었다. [킹]과 [물어라 쉭]은 그 후 신춘문예 최종심에 5번이나 오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결국 이 소설은 거기서 멈췄다. 결국 등단작은 다른 작품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가장 애정이 가는 소설이 이 소설이다. [물어라 쉭]이라는 명령에 온 세상을 향해 달려들었던 개 [킹]의 이야기는 좀 길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