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신춘문예 소설당선 도전기
08- 킹[물어라 쉭!] : 주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어릴 적 형은 집에서 키우던 개를 킹이라고 불렀다.”
소설강좌를 들으러 가는 차 안에서 계속 소설을 생각하던 나에게 떠오른 문장이었다. 실제로 어릴 적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개의 이름이 ‘킹’이었다. 그 이후로 항상 우리 집 개 이름은 킹이 되었다. 어떤 종의 개를 키우더라도 이름은 한결같이 킹이었다. 첫 문장이 떠오르자 다음 문장도 계속 떠올랐다.
“어린 나는 킹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메리나 쫑으로 불리던 다른 집 개에 비하면 킹은 어쩐지 폼나는 이름이었다.”
소설 속 킹은 경찰의 총에 사살된다. 킹을 훈련시키며 늘 붙어 다니던 형은 킹이 사살되자 원인을 제공한 마을의 터줏대감 ‘박씨 집안’의 선산에 밤에 몰래 들어가 킹을 묻고 고향을 떠난다. 그때부터 봉분도 없는 아주 작은 무덤이었지만 킹의 무덤은 박씨 집안 선산의 맨 윗자리를 떡하니 차지했다.
나는 이 소설이 나를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소설에 한참 열이 올라 모든 신경이 소설로 모아지던 시점에 기적처럼 첫 문장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내가 잘 알고 있던 킹이라는 이름의 개, 거기까지가 사실이었다. 한번 킹이라는 개가 떠오르자 다양한 이야기가 넝쿨처럼 딸려 나왔다. 킹이 무엇인가? 왕이란 뜻을 가진 킹! 형은 왜 개 이름을 킹으로 했을까?
이후 고향을 떠난 소설 속 형은 온갖 흉흉한 소식을 전해주고 방황하는 인물이 된다. 결국엔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는 존재가 되고, 그 형을 바라보고 자랐던 화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연구소에서 늘 승진하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이다. 연이어 승진에서 떨어져 폭음을 하고 잠든 날 새벽,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나는 흉흉한 소식을 전하며 세상을 떠도는 형을 찾아 떠난다.
이 소설은 첫 문장이 떠오른 후 3일 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미리 내 기억 속에서 소설로 탄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제목도 쓰는 중에 확고하게 정해 졌다. [킹]. 초고가 완성되고 문예창작대학에서 첫 합평을 받았을 때, 문순태 소설가는 이야기의 소재가 낡았다는 지적을 했다. 배경이 70년대 어촌의 느낌이 나니 현대적인 배경으로 바꾸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문우들의 경우는 킹이 의미하는 바가 잘 잡히지 않는다거나 반대로 너무나 주제가 직접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런 상반된 의견이 나온다는 것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하지 않은가. 나는 킹을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자유의지나 개성 혹은 정신을 대변하는 소재로 소설 속에서 역할을 주었다. 형에게 길들여진 킹이었지만 형과 함께 있을 때 킹은 무적이었다. 형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형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유약한 동생인 화자 [나]역시 그런 [킹]을 내 안에서 깨워야 하는 존재로 읽혔으면 했다.
야심차게 집필한 작품치고는 전반적으로 그 평이 그리 후하지 않았다. 나는 실망하면서도, 어쩌면 이 소설을 독자가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터무니없는 자만심을 부리며 신춘문예라는 전장에 나가 당당하게 살아 제 운명을 가지는 작품이 되길 바랐다.
한 섬마을을 배경으로 쓴 한 낱 반려견의 이야기였지만 모든 사회, 모든 조직 속에 내포된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란 주제가 가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한 개인의 저항 정신이나, 개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소주제로서 독자들이 행간을 읽어줬으면 싶었다. 주제를 구현할 소재로서의 킹! 그 킹을 기득권 세력의 선산 위에 묻고 떠나 멈춤 없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삶을 추구했던 형이란 인물이 유기적으로 맞물리게 하려고 애를 썼다. 작품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한 소설 쓰기가 어떤 것인지 그 느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등단하게 된다면 이 소설이 등단작이 될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수없이 문장을 다듬고, 사건의 순서를 바꿔가며 재배치했다. 제목도 [킹]과 [물어라 쉭] 두 버전으로 만들어 구성을 달리하기도 했다. 나의 기대대로 2012년 이 소설은 처음 한라일보 최종심에 올랐다. 그리고 해를 이어 광주일보, 대전일보, 전북일보를 거쳐 광남일보의 최종심에 올랐으나 끝내 당선작으로 선정되지 않았다. 제 운명을 획득하지 못하고 서랍 속에 갇혀버렸다.
기억에 남는 한 줄 평을 여기에 옮겨본다. 대전일보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전성태 소설가의 평이다.
“ 그런 가운데에서도「킹」이 보여주는 독특한 실감은 눈여겨볼 만했다. 형이 기른 셰퍼드 이야기라든가 권투 일화, 그리고 결말의 은둔과 종교 모티브는 형의 인생유전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유년기의 갈등을 다른 가문과의 반목에서 서사화하고 실종된 형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낙향한다는 결말은 너무 빤한 설정들이었다.”
장점이 있는데, 단점은 결말서사.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뻔한 결말 서사가 되지 않기 위해 공원을 거닐며 결말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도전한 광남일보 신춘문예에서 다섯 번째 최종심에 올랐으나 역시 당선작이 되지는 못했다. 심사를 맡았던 정지아 소설가의 심사평이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소설은 네 편이었다. 김만성의 ‘킹’은 킹이 되고자 했던 형에 관한 이야기다. 형이라는 인물이 생동감 있고 매력적이었지만, 그가 킹이 되고자 한 근거가 너무 전근대적이라는 점, 주제와 결말 또한 너무 낡았다는 점 때문에 가장 먼저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입체적 인물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는 오랜만에 즐겁게 읽은 소설이었다.
뻔한 설정, 낡은 주제와 결말, 전근대적! 이런 심사평의 단어가 나를 괴롭혔다. 19살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첫 신춘문예에 도전했다가 20대 중반에 대학신문에 소설이 당선된 후 20여 년이 흘러버린 세월의 벽이 너무 높은 것은 아닌가 절망감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나는 한편으로 나를 격려했다. 낡은 주제란 게 있을까? 과거에 중요한 가치는 현재도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지 않겠는가? 나는 다시 힘을 내보기로 했다. 이렇게 꾸준히 최종심에 오르는 작품을 썼다는 것만으로 나를 좀 칭찬해 주기로 했다. 쓰는 과정의 몰입과 고민이 쓰고 난 후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한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쓰고 있는 한 작가이다’라고 했던 문순태 소설가의 말을 다시 한번 가슴속에서 끄집어냈다. 계속 쓰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다행히 소설의 소재는 계속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의 창작열을 자극했다. 이번에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의 일, 증권회사의 업무와 관련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제33회 근로자문화예술제에서 금상을 수상한 [서킷브레이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