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신춘문예 소설당선 도전기
10 - 문장을 고민하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문순태 문예창작대학에서 소설강좌를 듣고 2년이 흘렀다. 습작품이 하나 둘 늘었지만 등단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사실, 나는 소설도 기업에서 프로젝트 맡아서 하듯이 혼신의 힘을 다하면 금방 성과가 날줄 알았다. 대학신문에서 당선한 경험도 있고, 신문방송학과에서 기사 문장이지만 글 쓰는 훈련도 했는데, 이만한 기초면 등단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거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예상대로 본격적인 소설공부를 하고 쓴 소설이 신춘문예 최종심에 턱턱 올라가는 걸 보면서 더 기고만장했다. 나는 3년을 마지노선으로 잡았다. 이만큼 집중하고 노력했는데 실패할리 없다고 생각하며 3년 차 겨울의 신춘문예 결과를 기다렸다. 두군데 지방지에서 최종심에 올랐지만 당선되지 않았다. 그 후로 등단하기까지 10년이란 긴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버렸다.
19살에 첫 신춘문예 도전을 하고, 생업에 빠져 소설을 잊었다가 번아웃을 경험하고 다시 소설을 썼다. 근로자문화예술제라는 공모전에서 수상은 했지만 제한된 사람들이 참여한 곳에서의 수상은 등단이 아니었다. 3년 정도면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소설가의 길이 조금씩 멀어졌다. 애써 표정은 온화하고, ‘쓰고 있는 한 작가이다.’라는 말로 정신승리를 하며 소설을 계속 썼지만 내심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나를 수렁에서 건져준 소설마저도 나를 외면하는가 싶어 두렵기까지 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것을 더 훈련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다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내 작품이 합평을 받던 어느 날!
한 문우가 말했다.
"김만성 씨 문장은 술술 읽히는데 그만큼 밀도가 낮아 깊이가 좀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최종심 한줄평에서도 종종 문장과 문체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2023년에 전남매일 신춘문예에 당선한 소설 [보스를 아십니까]는 재수, 삼수를 통해 등단의 기쁨을 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초기에 [후계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투고했는데 최종심에 올라 이런 평을 얻었다.
“김만성의 ‘후계자에 대하여’는 소재성에서도 이야기를 구축하는 능력에서 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화(逸話)를 동원하여 중심 이야기를 눙치는 것 등, 습작을 오래, 또 많이 한 작가라고 생각된다. 소설은 언어예술이라는 점을 좀 간과하고 있다는 우려를 주었다. 멋진 문장만을 말하지 않는다. 소설이 예술성을 획득하는 것은 서사성에서만 아니라, 그것의 표현인 언어에 의해서도 완성된다는 점을 조금 간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쯤 되자 나는 문장에서 답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남의 글을 읽을 때는 흠도, 장점도 잘 보였는데 내 문장은 어디가 문제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고민을 듣던 문우 한 분이 필사를 해보라고 했다. 필사는 좋은 작품을 따라 쓰면서 문장을 훈련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워드프로그램으로 타이핑을 하거나 자필로 노트에 베껴 썼다. 쓰면서 읽는 동안 색다르게 소설에 접근할 수 있었다. 맥락만을 이해하며 읽던 소설이 현미경으로 문장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이장욱의 [오래된 일기], 김훈의 [화장],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여러 번 필사했다. 성경의 [잠언]과 [시편]도 좋은 문장교재였다. 필사를 통해 나는 설명문과 묘사문의 차이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한 번 읽고 나서 왠지 필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소설도 아닌 책을 필사했다. 아울러 소설작법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무엇이 도움이 되었을까?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이런 과정은 나의 개성을 약화시킨 반면에 글을 좀 더 매끄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늘 마음 한 편에선 내가 이렇게 순화되어도 되는 것일까 라는 반항심이 마음 한 편엔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한 작법서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만났다.
“사랑에 대해서 쓰고 싶으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 죽도록 사랑한다. 너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써서는 안 돼요. 대신에 사랑하는 사람과 어제 무엇을 했는지, 어디를 갔는지, 함께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를 써야 합니다.”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금방이라도 설명하지 않고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소설을 말할 때 꼭 언급되는 표현이 있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많았어요.”
이는 소설에서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컫는 말이면서 좋은 소설의 기본은 문장에 있다는 선언과도 같은 말이다. 소설가 김훈의 문장을 칭찬하는 이들이 많은데 독자는 물론 전문가들도 그의 문장에 후한 점수를 준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다. 주어와 술어 조사의 선택 하나까지 고심한다. 지방을 쫙 뺀 군살 없는 몸매를 추구한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쓴 [칼의 노래]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이순신 장군의 심정을 묘사한 부분에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난다.
“진주성에서 조선 군사 5천이 죽었다.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이 부분을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은 간결한 보여주기 문장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했다.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이해될 때까지 반복해 읽었다. 진주성 함락의 참상을 개와 닭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는 짧은 문장으로 집약해 버린다. 개와 닭 한 마리 살아남지 않은 현장에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 그리고는 진주성 함락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는 행동묘사로 보여준다. 이 두 문장으로 나는 임진왜란 당시의 진주성 전투의 치열함과 그 소식에 반응하는 이순신 장군의 안타까운 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보여주라는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설명문 보다 묘사문의 실감을 알게 되자 소설 읽는 재미가 더해졌다. 더불어 소설 쓰는 즐거움도 배가 되었다. 설명문은 속도감 있게 전개할 때는 필요하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분량이어야 소설의 밀도가 높아진다. 작품이 풀리지 않을 때 작가는 설명문으로 훌쩍 뛰어넘어가고픈 유혹에 빠진다. 서사를 핍진한 묘사 없이 겅중겅중 건너뛰어 빠른 결말에 이르고 싶어 진다. 나의 기존 소설들이 묘사문의 눈으로 바라보니 대부분 그랬다. 서사는 살아 있는데, 속도가 빨리 결말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니 막힘없이 읽히는 데, 다 읽고 나면 밑줄 그을 만한 문장 하나가 없었던 것이다.
소설 3요소 주제, 구성, 문체 중에서 나의 소설은 주제, 구성에만 치우쳐 있고 문체를 이루는 문장은 소홀했다. 현대 소설은 이 3요소를 딱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그 작가만의 문체를 갖지 못하면 그저 그런 소설가가 될 뿐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문장으로 나만의 문체를 구축했을 때 소설가의 꿈을 이룰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필사를 통해 좋은 문장의 구조를 익히고, 내가 쓴 습작품을 고치고 또 고쳤다. 초고는 쓰레기 일 뿐이란 말이 조금씩 실감되었다. 초고가 열 번 이상의 퇴고를 거치고 나니 전혀 다른 작품이 된 경우도 있었다. 문장도 하나하나 그 단어가 거기에 적확하게 쓰였는지 살폈다. 김훈 소설가가 [칼의 노래]에서 첫 문장을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고 썼는데, ‘꽃은 피었다’와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했다는 일화처럼 나도 문장을 가지고 고민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누가 알 것인가? 그렇게 건져 올린 문장 하나가 천년의 운명을 가지고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