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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만성 Oct 20. 2023

30 신춘문예 소설당선 도전기

11 - 청바지: 첫사랑을 쓰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첫사랑은 아련한 기억이다. ‘아련하다’는 또렷하거나 분명하지 않고 희미하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의 희미한 기억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고 하지만 개인역사인 첫사랑은 작가에게 다양한 만약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내가 좀 더 용감했더라면, 내가 참았더라면, 곧바로 내가 집으로 찾아갔더라면 등등. 

   내게도 첫사랑이 있었다. 일명 ‘새’로 불렸던 첫사랑. 그녀는 먼저 다가왔다가 또 먼저 돌아서버렸다. 그래서 새가 되었다. 나는 먼저 날아왔다가 훌쩍 떠나가버린 새를 오랫동안 미워했다.  쉽게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못할 상체기도 남았다.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왜 이별을 통보하고 날아갔는지 이유도 모른 채 아프기만 했다. 사실은 그 이유를 듣게 되면 주저앉아 영원히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여린 마음이 그때는 나를 지배했다. 


   쓸만한 글감을 눈 번뜩이며 찾던 어느 날 기억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새가 문득 떠올랐다. 그러자 내 첫사랑의 경험이 어떻게 소설로 살아날지 호기심이 솟구쳤다. 영화 [건축학개론]이나 [화양연화]가 떠오르며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었다. 

   내 첫사랑을 소재로 [청바지]란 제목의 소설이 완성되었다. 다른 소재의 글쓰기에 비해 특이한 경험이었다. 나는 어떤 구성도, 주제도 미리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새’라는 이미지 하나만 가지고 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새가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알 수 없었지만 기꺼이 어디로든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초고를 쓰고 나니 뭔가 2%가 부족했다. 못 이룬 사랑에 대해서 잔뜩 골을 내고 있는 것도 같고, 헤어진 이유를 변명하고 싶어 하는 얄팍한 자존심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다. 말랑말랑한 치유의 서사를 원했던 나는 여지없이 실망했다. 어디에서도 건축학개론의 간질거림과 화양연화의 아련함이 없었다. 몇 번 고쳐보긴 했지만 역시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실패한 첫사랑은 실패한 소설이 되는가 싶어 씁쓸하기까지 했다. 어떤 기대감도 없이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어라? 예상과는 달리 최종심에 올라 한 줄 평을 얻었다. 


  “<청바지>는 증권 객장에 근무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상황 설명에 치중하고, 독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주려는 욕심이 앞선다. 거기에 이야기의 또 한축을 이루는 과거 이야기가 현재의 증권 이야기와 섞이지 못하고 따로 논다.”     

  심사평에 이 소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들어 있다. 첫사랑 이야기를 현재 내가 근무하고 있는 증권사의 배경 안으로 끌고 들어오다니 이런 미스매치가 있을까. 더욱이 그렇게 연습했음에도 상황설명에 치중한 문장이라니 빛나는 묘사문은 어디로 보내버렸을까. 아주 짧은 연애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진전 없이 손 한번 잡아버리고 만 풋사랑 경험 때문이었을까? 사랑에 대해서 쓰려면 함께 걸었던 길, 함께 먹었던 음식, 함께 나눴던 얘기를 써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상상력은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실패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거 이야기인 첫사랑과 현재의 증권 이야기는 당연히 섞이지 못하고 따로 놀았을 것이다. 


   이런 혹평을 들었지만 한편으론 뭔가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실패의 반복이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래서 나는 소설을 더 쓸 수 있겠구나 싶었다.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또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펴고, 만약을 설계하려는 도전이 있는 한 내 심장이 계속 뛸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하리 만치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못난이 같은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최종 4편 안에 들어서 심사위원에게 읽혔다는 사실이 어설픈 첫사랑이 계속되어도 좋다는 허락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 이 소설을 고치지 않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첫사랑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았다. 모두가 말한다.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 놓고 확인하려 하지 말 것.  첫사랑은 첫사랑이어서 설레고 아프며 애달프다. 그런 기억이 있다는 것은 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리라. 어디선가 ‘새’는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들을 키우겠지. 내가 어설프게 복원하려고 시도했던 첫사랑 소재의 소설은 이 정도의 엉성한 상태로 남아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이상하게 이 소설에 애정이 갔다. 

  

   이 브런치의 연재가 끝나고 나면 소설가로서 첫 창작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청바지]를 실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결정했다. 엉성한 상태로 구멍이 숭숭 뚫린 이 작품이 첫 창작집에 실리는 것은 운명이라고......

  첫사랑이 젊은 날의 출발이었다면 첫사랑을 소재로 한 어설픈 작품도 소설가로서의 출발인 첫 창작집에 실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청바지]를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어설픈 회복을 시도하지 말고 영원히 이뤄지지 않은 아름다운 실패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걱정이다 [청바지]가 첫사랑 소설이란 것을 모르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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