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신춘문예 소설당선 도전기
12 - 골드: 낡고 오래된 것에 주목하라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매일 떠오르는 새로운 생각과 연애를 하는 일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을 관찰하는 일이면서, 매일 일어나는 사건을 곱씹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운전 중에 갑자기 굉음을 내고 추월하는 차를 보면서 예기치 못한 운명을 생각하는 일이고, 버스 안에 탄 머리 긴 소녀를 보고 장편소설을 쓰는 일이다. 그리고 매일매일 타고 다니는 차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이렇게 소설을 쓰려는 사람에게는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일상이 날마다 이어진다. 이게 소설가의 행복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모든 것이 소설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니 지루한 일상이란 게 있을 수 없다. 누군가가 건네는 평범한 말 한마디, 직장 동료의 습관적인 행동 하나, 출근길에 같은 지점에서 스치는 익명의 인연이 어느 순간 소설의 문장이 되고, 인물이 되고, 사건이 된다. 소설가의 눈에 한번 띄면 그때부턴 지루한 일상이 오히려 생동감 있는 활력의 시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들꽃이란 시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시인의 눈은 꽃 한 송이에 자세히, 오래 머문다. 소설가의 눈도 다르지 않다. 자세히, 오래, 여기에 상상력을 더한다. 특히 낡고 오래된 사물은 어느 순간 살아나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함께 한 시간이 많은 만큼 나눌 추억도 많아진다.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간관계의 가변성은 오히려 사물을 통해 위로받기도 한다.
나는 삼성생명 입사 후 2년 차에 기아자동차의 아벨라 델타를 사면서 마이카족이 되었다. 5년을 탄 후 삼성그룹의 야심작 삼성자동차의 SM520으로 바꿨다. 첫차의 색상은 화이트였고, SM520은 골드였다. SM520은 나의 발이 되어 15년 이상을 함께 했다. 나의 직장생활의 애환과 함께했고, 아이들의 성장을 모두 지켜보았다. 차 안에서 울고, 웃고, 잠들었던 시간도 수없이 쌓였다. 잦은 발령지에 항상 함께 따라왔고, 어쩌면 내 삶의 가장 기쁘고, 슬픈 사건들을 함께 겪었다. 그 차에 나는 [골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내와 아이들도 덩달아서 차를 골드라고 불렀다.
소설공부를 위해 골드를 타고 광주호를 지나 생오지까지 매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다녔다. 골드 안에서 습작품을 읽고, 기성 작가의 작품을 읽고, 때론 퇴고를 하기도 했다.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는 골드를 타고 우체국까지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차 [골드]가 말을 걸어왔다. 소설 공부를 하고 등단기한으로 예정했던 3년이 지나고 몇 해가 더 지났어도 등단하지 못한 아마추어 소설가로서 습작만 계속하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2019년 겨울 신춘문예 발표가 마무리되고 역시 내 이름이 당선자 명단에 오르지 못한 것을 확인한 날이었다.
“괜찮아?”
골드가 말을 했을 리는 없다. 아마도 내 안의 내가 나를 위로하려고 물은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골드 안에서 괜찮냐는 음성을 듣고 한동안 꼼짝하지 않은 채 시트를 뒤로 젖히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라디오를 켜니 항상 맞춰 놓은 클래식 채널에서 잔잔한 피아노 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바로 메모를 시작했다.
‘20년 된 차를 타는 만년 과장의 이야기’
메모가 시작되자 직장생활의 애환이 과장되어 내 안에서 쏟아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며 메모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 멈춰버린 직장에서의 승진과 노력하고 있음에도 등단하지 못하는 소설에서의 미성취가 팀을 이뤄 나를 밀어붙였다. 그렇게 시작된 소설이 [골드]다.
이 소설은 나에게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안겼다. 전라매일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이 되었다. 이 당선은 고백하자면 모든 운이 이번에는 이 가여운 중생에게 희망을 주자는 신의 뜻이 작동했다고 본다.
신춘문예는 한국만의 독특한 등단제도이다. 그 폐해도 많다고 하지만 신춘문예를 통해 새해 첫날 화려하게 신문에 글과 이름을 알리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전국을 대상으로 발간되는 중앙일간지의 소설 경쟁률은 500대 1을 넘는 것이 다반사고 지방지도 100대 1은 기본이다. 그나마 경쟁률이 약한 지방지등단을 나는 처음부터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주로 활동하는 광주, 전남의 지역신문에 투고했다.
2020년 1월 1일 나는 군산으로 발령을 받았다. 오랫동안 연고를 두었던 광주를 떠나 전북지역으로 발령받자 퇴근 후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군산의 월명호수공원을 칸트가 오후 산책을 하듯이 퇴근 후 정해진 시간에 매일 걸었다. 두 시간 정도를 천천히 걸으면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며 머리로는 그동안 썼던 소설들을 하나씩 소환하여 다시 쓰기 시작했다. 산책이 끝나면 겨울철새가 날아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퇴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2021년 12월에 오랜만에 들어간 [신춘문예 공모나라] 카페의 공지에서 12월 17일까지 작품을 받는 전라매일의 신춘문예 공고를 보았다. 어떤 기시감이 있었던 것도 같다. 나는 작품 [골드]를 노트북에 다시 띄워놓고 빠르게 한 번 더 읽었다. 몇 군데 문장의 순서와 단어를 수정하고 응모했다.
12월 24일 퇴근 후 나는 생애에서 가장 기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심사를 맡았던 김명희 소설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최종 결정 전인데, 혹시 전라매일에 응모한 작품을 다른 신문사에 중복투고하지는 않았는지? 그럴 리 없겠지만 무 의식 중에 표절이 있을 수도 있는데, 작품을 쓰면서 참고하거나 유독 생각하면서 쓴 작품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생각하고 말고도 없이 소리치듯 말했다.
“없습니다. 순전히 저의 가슴에서 저의 머리에서 나온 작품입니다.”
내 목소리가 좀 컸을 것이다. 김명희 소설가는 가볍게 웃었다. 최종적으로 신문사에서 전화가 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나는 통화를 끝내고 나서 한동안 침묵하면서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비로소 당선이라는 소식이 실감 나자 아무도 없는 군산의 원룸 숙소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이후 신문사에서 당선축하 전화가 오고, 당선소감과 사진을 요청했다. 시상식 날짜에 대한 일정도 알려왔다. 심사위원인 김명희 소설가는 농민신문 장편소설 공모로 등단하여 전북지역에서 활동하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의 섬세한 심사를 잊을 수 없다. 전라매일이 신춘문예 공모로는 가장 늦게까지 작품을 받은 곳이라 2022년 응모에 108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는데, 혹여 당신이 잘 못 읽어 놓치는 작품이 있지 않을까 싶어 밤새워 그 작품들을 다 읽었다고 했다. 김명희 소설가의 심사평은 당선만큼이나 나를 위로하고 감동케 했다.
“<골드>와 <상실의 벽>을 두고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골드>에 낙점을 찍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제, 그것들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는 저력이 있었다.
작품 전반에, 깊은 사유의 흐름이 배어 있다. 이만하면, 문장과, 주제와 작가의 자기 생각을 보자 했던 심사의 취지는 충족된 셈이다.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더욱 정진해 주시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렸던 신춘문예 당선소감은 처음엔 막막하더니 노트북을 펼치니 의외로 쉽게 써졌다. 아마도 내 안 어딘가에서 육성이 되어 터져 나올 날을 기다렸던 것처럼......
“오랫동안 소설가를 꿈꿨다. 19살에 첫 신춘문예투고를 했으니, 올해로 34년의 시간이 흘렀다. 간간히 투고를 쉬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매년 우체국에 들러 신춘문예에 응모 후 마감했던 나의 12월의 정례행사를 이제 마치게 되어 시원섭섭하다.
무엇이 그 긴 시간을 소설의 곁에서 서성거리게 했을까? 아마도 나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보고픈 욕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도 알 수 없던 나에 대한 탐구가 세상과 타인으로 확장되었다. 어느 사이 내 안 깊은 곳에서 이야기가 꿈틀거렸다. 처음엔 나의 이야기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그것은 너의 이야기였고, 그의 이야기 거나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이제, 좀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고, 그리고는 더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가르침을 주신 생오지창작촌의 문순태, 은미희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생오지에서 웃고 울었던 문우들의 기뻐하는 모습도 눈에 선하다. 함께 멀리 갈 수 있기를 바란다. 든든한 지원군! 아내와 3남매의 믿음이 내 안의 힘을 키워줬다. 고맙고 사랑한다. 나를 성장시킨 삼성생명과 한화투자증권의 고객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등단 전에는 ‘쓰고 있는 한 작가다’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써야 작가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긴다. 작은 목소리를 들어주신 심사위원과 전라매일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부지런히 쓰는 작가가 되겠다.”
시
2022년 1월 3일에 나의 글이 전라매일 13면과 14면에 실렸다. 심사평과 당선소감도 사진과 함께 실렸다.
연이어 한국소설가협회에서 '2022 신춘문예당선소설집'으로 발간하면서 생애 최초로 소설가로서 계약서라는 것을 써보기도 했다. 단 한 편의 작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밤새 정성스럽게 읽어준 심사위원, 오랫동안 머물렀던 도시를 떠나 새롭게 소설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군산으로의 발령, 갓 신춘문예를 시작한 신문사 등등. 운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드디어 나는 소설가가 된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