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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만성 Oct 09. 2023

30년 신춘문예 소설당선 도전기

05. 나를 보다 : 삼성생명 입사 후 유니텔 문학동호 회원이 되다.

   

  머리를 쥐어뜯던 고뇌의 시간이 흘렀다. 군대 제대 후 예비역 복학생이 되자 정치지형에 변화가 생겼다. 대립했지만 한 방향을 보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노태우 정권의 보통사람 시대를 거치면서 영영 갈라섰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겠다고 호랑이굴로 들어가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마지막 도전이라며 김영삼과 맞섰으나 대통령 선거에 패하고 정치은퇴를 선언했다. 한 시대가 저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막연하고 불완전하고, 불만스러웠으나 역사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더욱이 95년에 실시된 전국지방동시선거는 풀뿌리민주주의의 출발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세상의 고뇌를 다 짊어지고 나라를 걱정하던 이십 대의 청년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투쟁의 길이 남았으니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 불완전하고 불만스럽지만 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아닌 문민정부에서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 직장인의 길을 갈 것인가.

  결국 나의 선택지는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소박한 이유가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29년 일제치하에서 2남 2녀의 셋째이면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1녀 4남의 장녀셨다. 두 분은 당시 풍습대로 중매로 만나 나를 포함해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나는 그 6명 중에서 어머니께서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 막내였다. 아버지는 6.25에 참전해 하사로 전역했지만 국민학교 공부도 하지 못한 무학이었고 어머니도 마찬 가지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한문과 한글을 깨쳐 문중의 재무 일을 보셨다. 필체도 좋으셔서 어렸을 때 아버지께 글을 대신 써달라는 동네 분들이 꽤나 있었다.

  4남 2녀의 막내인 내게 부모님은 기회를 많이 주셨다. 위로 형과 누나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여건도 허락되지 않았다. 고만고만하게 고흥반도 남단의 척박한 섬마을에서 자식들 굶어 죽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는 것이 부모님께는 전부인 삶이었다. 나는 늦둥이였기에 부모님의 근면성으로 나아진 가정살림 덕에 섬마을에서 광주시로 소위 말하는 유학을 할 수 있었다. 보통 집안의 장남에게 주어진 기회를 나는 막내로서 누릴 수 있었다.


  대학재학시절 내내 부모님은 내게 헌신적이었고, 공부를 잘해서 출세하는 자식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 기대는 졸업을 준비하던 시절 여전히 보일러 시설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시골 양철지붕집(초가집에 지붕만 양철로 바꾼 집)을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양옥으로 새로 지어드려야겠다는 결심으로 구체화되었다. 나의 선택지는 대기업 입사였다. 나는 입사 6개월 후 3천만 원을 대출받아 초가집을 허물고 2층짜리 양옥을 현대식으로 지어드렸다. 고된 농사일이 끝나면 따뜻한 물을 받아 목욕이라도 하라는 의도였는데, 기름 값이 많이 든다며 보일러도 제대로 틀지 않은 부모님을 볼 때마다 속이 상하기는 했다.

  내가 입사한 대기업은 삼성생명이었다. 삼성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조직에 대해, 인간관계에 대해 그리고 출세에 대해... 긍정이 6할이고 부정이 4할 정도였다고나 할까. 결혼을 했고 2녀 1남의 아버지가 되었다. 나의 아버지처럼 열심히 일에 매달렸고, 승진도 제 때 했다. 소소한 표창을 받으며 대리, 과장으로 승진했다. 집을 사기에 충분한 연봉과 복지체계가 나를 안락한 소시민으로 만들었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빼면 모든 게 평안했고 미래는 무난해 보였다. 나는 전공과는 생소한 보험업의 발전을 선두에서 창조하는 기획자가 되었지만 거대한 조직 속에 잘 자리 잡은 부품이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했다.

  삼성생명 빌딩은 관리를 잘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거의 매일 청소원이 쓸고 닦고, 매월 1회씩 왁스칠로 바닥이 번쩍번쩍 빛났다. 화장실도 웬만한 호텔급 이상으로 청결하고 깨끗했다. 깨끗한 화장실에 들어설 때면 옷매무새를 절로 한번 돌아볼 정도로 벽에 걸린  큰 거울이  압박했다.

 ' 이 기업에 맞는 옷차림과 마인드로 회사에 쓸모 있는 인재가 되어라'

  그렇게 말하는 것도 같았다.

  IMF가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전 입사 후 2년이 지난 1996년 어느 날 나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벽보 하나를 발견했다.

  흡연 금지!

  하얀 백지 위에 빨간 글씨로 적어 코팅처리까지 한 벽보가 깨끗한 화장실 벽면에 붙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청결을 강조하는 화장실에 들를 때면 조금씩 위축되는 나 자신을 느끼곤 했다. 딱히 그럴만한 이유는 없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된 직장생활에도 불구하고, 나는 뭔가 빈곤감을 느꼈다. 그 감정이 화장실에 부착된 금언문구하나에 폭발했다.


  [화장실에서 나를 보다]

  너무나 직접적인 주제를 드러내는 이 소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공과는 무관한 금융회사에 입사한 것도 그렇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직장생활의 분위기도 그렇고, 자발적으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매뉴얼대로 일하는 것이 무난한 업무도 그렇고 모든 것이 나를 나답게 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화장실 벽에 낙서를 하고,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다가 옆 칸에 들어온 사람에게 불쑥 말을 거는 소설 속 주인공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상태다. 우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는 현실세계에서 자아를 잃어버리는 상황은 자주 발생한다. 현실이 바빠서도 그렇고, 경쟁이 심해서도 그렇지만 안정된 상태에서도 창의적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삐걱거리고 방황하게 된다. 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혼자만의 공간 화장실에서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인공에게 주고 싶었다.

  이 소설은 여러 번 개작을 거쳐 신춘문예에서 최종심에만 세 번 올라갔으나 최종 선택을 받지는 못했다. 한 심사위원은 최종심에서 이렇게 한 줄 평을 남겼다.

  “ ‘나를 보다’는 잘 읽히는 문장이 돋보였지만 중요한 인물인 미스강의 역할이 애매하였으며 화장실 낙서와 나의 심리적 갈등을 제대로 엮어내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직장인에게 3번의 위기가 온다고 한다. 대리로 승진하려는 첫 3년, 그리고 과장 승진시기인 6년 차,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9년 차 때 이직에 대한 고민, 적성에 대한 고민, 잃어버린 꿈에 대한 고민이 번갈아 찾아온다.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첫 3년 차 때 이 소설을 쓰면서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대리로 승진했고, 직장인으로서 잘 만하면 소설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다.

  이 작품을 완성하고 나는 당시 한참 유행하던 온라인 유니텔 문학동호회에 가입했다.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온통 뜨거운 이들이 전국방방곡곡에 숨어 있었다. 통신을 통해 연결된 이들은 곧 거대한 집단을 만들었고, 그곳에는 이미 등단한 문인들이 고문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나는 유니텔 문학동호회에서 소설 동인이 되기 위해 또 하나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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