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제 Jan 15. 2024

아픈 아이들을 돌보다 몸져눕다

독감 걸린 딸과 아빠

운수 좋은 토요일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첫째 친구집에 놀러 갔다. 얼마만의 혼자 있는 주말인지. 네 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있었다. 한 시간 쯤 집을 청소하고 자주 가는 카페로 갔다. 밀린 일도 처리하고 여유롭게 책도 읽었다. 한 달에 한 번쯤 이런 주말을 보낼 수 있다면 참 좋을 듯했다. 한참을 신나게 놀았을 아이들을 마중 나갔다. 유모차에 탄 둘째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고, 엄마 손을 잡은 첫째는 피곤하다며 업어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놀아서 피곤한 거라 여기며 첫째를 업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아이들 일찍 잘 것 같아. 맛있는 거 시켜 먹을까?” 아내에게 속삭였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의 옷을 갈아입히는데, 첫째 딸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둘째도 울음을 그친 지 꽤 되었는데 콧물이 계속 흘렀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독감과 폐렴이 유행이니 주의하라는 어린이집의 공지사항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일찍 재울 수 있겠다며 몰래 기뻐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급한 대로 집에 있던 감기약과 해열제를 먹였지만 첫째의 체온은 밤 사이에 39.5도까지 올랐다.


일요일 아침,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동네 병원들은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아서 차를 타고 이십 분 정도 가야 했다. 병원에는 마스크를 쓴 엄마 아빠와 아이들로 가득했다. 부디 독감만 아니기를 바라며 둘째와 병원 건물 복도에서 한참을 놀았다. 첫째는 병원 대기실에서 엄마 품에 안겨 축 늘어져 있었다.




A형 독감이었다. 긴 막대에 코를 찔린 첫째는 아직 눈물을 그치지도 못했는데 검사 키트에는 벌써 빨간색 두 줄이 선명했다. 첫째는 그동안 심하게 아파본 적이 없다. 유아기에 흔히 걸리는 중이염 정도가 가장 아팠을 때다. 건강한 편이지만 아빠 눈엔 한없이 여린 어린 딸이 독감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덜컥 걱정이 되었다. 둘째는 일반적인 코감기로 보인다는 의사의 말이 그나마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다음 주에 하려 했던 일이 많아서 내심 허탈했지만 이럴 때 내가 아이들을 잘 돌봐야 한다고 의지를 다졌다. 독감과 타미플루 복용 주의사항을 유심히 듣고 나와 첫째에게 약 잘 먹고 잘 자면 금방 괜찮아질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그날 평소보다 낮잠을 길게 잤고 음식은 적게 먹었다. 힘이 없어 축 쳐진 아이들을 다독이며 다음 주에 아이들을 간호해야 하는 나를 다독였다. 혹시 둘째와 아내에게 독감이 전염될까 첫째와 함께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젖은 손수건으로 아이의 얼굴과 몸을 닦고, 수분이 부족할까 봐 이온 음료를 먹이고, 팔다리를 주무르며 아이가 편안히 잠들기를 바랐다. 독감과 싸우는 아이의 몸은 깊은 잠에 금방 빠져들었고, 나는 한참 동안 아이를 바라보았다. 새벽 한시쯤 아이의 체온이 39도 중반까지 올랐을 땐 열이 떨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아이의 몸을 닦아주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하는 내 한쪽 눈에는 짙은 쌍꺼풀이 생겨 있었다. 아내는 며칠 동안 내가 너무 힘들까 봐 염려하는 눈치였지만 이 정도로 뭘 걱정하냐며 허풍을 떨었다. 다행히 첫 이틀은 그럭저럭 무탈하게 흘러갔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으니 아침에 마음 급할 것도 없었다. 천천히 밥을 먹고 치우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함께 하고, 알아서 잘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간단한 점심 식사를 차려 먹고 약 기운에 빠진 아이들은 금방 오후 낮잠을 잤다. 첫째의 열이 잘 떨어지지 않아 계속 신경 쓰였지만, 전반적인 컨디션은 점차 회복되는 중이었다. 특히 둘째는 화요일 저녁쯤부터 콧물이 조금 흐르는 거 외에는 아무 증상이 없었다. 아이들이 심하게 아프지 않아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들을 잘 돌봤구나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대로 이틀 정도만 잘 보내면 아이들이 완쾌하겠구나, 어쩌면 금요일에는 어린이집에 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도 생겼다.




기대는 실망을 불러오고 육아는 마음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수요일 오후부터 내 마음에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하루종일 두 아이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컨디션을 상당히 회복한 아이들은 집에서 본격적으로 뛰놀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넘치는 두 아이를 혼자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하지 마’, ‘안돼’, ‘조심해’처럼 부정적인 말을 반복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아이들이야말로 집에 갇혀 있기도 힘들었을 텐데, 몸 상태가 좋아져서 아이들은 기분이 좋았을 텐데. 두 아이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 계속 말을 안 듣는 아이들에게 욱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둘이 다투거나 위험한 행동을 할 때 몇 번이나 화낼 뻔했지만, 얼마 전 처음으로 둘째에게 큰 소리로 화낸 일을 후회하는 중이라 겨우 화를 참아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수요일 저녁부터 갑작스레 열이 나더니 밤 사이에 체온이 38도 중반까지 올랐다. 자기 전에 구비해 둔 감기약을 먹었지만 소용없었다. 새벽에는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식은땀도 나더니 머리가 깨질 듯했다. 작년에 코로나에 걸렸을 때처럼 온몸이 심하게 아팠다. 약한 감기는 종종 걸려도 심한 감기는 안 걸리는 편인데, 첫째를 돌보며 같이 자다 보니까 독감에 옮은 것 같았다. 심한 통증에 정신이 없는데도 아이들에게 자꾸 화가 났던 이유가 내가 아파서 그랬던 거라며 죄책감을 덜어냈다. 내가 이상했던 게 아니구나, 육아에 지친 게 아니구나, 아프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아픈 아이들 간호하다가 나도 아프게 되었네, 이거야말로 부모의 희생이지, 나 아직 괜찮은 아빠구나.


도저히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아내는 급하게 휴가를 써야 했다. 다음날 아침 바로 병원에 가서 독감 검사를 했다. 이상하게도 검사 키트에는 한 줄이 더 생기지 않았다. 단순한 감기로 이렇게 아팠던 기억이 없는데 이번엔 왜 이렇게 아픈 건지. 주사를 한 대 맞고 해열제가 들어간 약을 받아 오는 길에도 계속 의아했다. 이렇게 아픈 이유가 뭘까.


그리고 어린이집에 보내지는 못했다...




아내가 집에 있어준 덕분에 하루종일 계속 쉴 수 있었다. 빙빙 도는 천장을 보며 아이들에게 자꾸 화가 나는 내 마음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의 행동은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아이들이라서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아이들을 잘 돌보고 싶어서 살짝 다칠 수 있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습관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을 잘 간호해서 얼른 회복하도록 돕고 싶었다. 아이들이 회복하는 며칠 동안 아이들이 힘들지 않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아빠로서의 의무감이 쌓이는 동안 마음속에서 예민함도 쌓이고 있었다.


다행히 금요일 아침에는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었다. 도대체 하루 반나절 동안 왜 그렇게 아팠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푹 쉬면서 나를 돌아보라는 의미였을까. 첫째는 아직 미열이 남아 있고 콧물감기 증세도 있어서 조금 더 휴식이 필요했다. 둘째는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는 상태였지만 괜히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에 하루 더 함께 쉬기로 했다. 다 같이 하루만 더 무사히 보내면 주말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일요일 오후에 아내가 혼자 카페라도 다녀오라고 시간을 내주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커피를 일주일 만에 마셨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이번 주에 하려 했던 일들과 읽으려 했던 책들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난 토요일 저녁부터 이어진 긴장감이 아직 조금 남아 있는 듯했다.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동안 두 아이들과 보낸 장면들이 머릿속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얼마나 멍하니 앉아 있었을까. 첫째가 더 심하게 아프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아메리카노의 쓴맛이 느껴졌다.

이전 06화 아이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고 말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