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OO, 안녕? 어느덧 11월 말이 되었네. 오늘 아침 산책길에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길가에 켜켜이 쌓여 있는 걸 봤어. 오후에 단골 카페에 가보니 창 한편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이고 있더라.
이번 연말에는 다음 해가 정말 기다려져. 어떤 시기나 나이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닌데 말이야. 2024년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가 될 것 같아. 완전히 다른 삶을 선택한 내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인연과 우연을 마주칠지, 아내와 아이들과 또 어떤 시간을 쌓을지. 기대되는 게 많아.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는 것처럼.
OO, 벌써 네 번째 <엮은이 닷노트> 편지야. 그동안 편지를 쓰면서 OO는 어떤 사람일까 그려보곤 해. 어떤 걸 좋아할까, 무슨 일을 할까, 오늘 하루는 어땠을까, 내 편지를 기다렸을까, 어떤 표정으로 내 편지를 읽을까, 다가오는 한 해를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주에 나의 커리어와 일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어. “왜 일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마침내 선택한 나만의 답. 오늘도 지난주 편지에 이어서 퇴사에 대한 생각을 써보려 해.
‘닷노트’라는 필명은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따온 이름이야. 대학생 때 이 연설을 무척 감명 깊게 보았고, 잡스의 메시지는 당시 커리어를 고민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되었어. 물론, 내가 자라온 환경과 좁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진로를 선택하였지만.
올해 1월, 마지막으로 퇴사를 결심할 때 이 연설이 떠올랐어. 거의 10년 만에 봤는데도 여전히 잡스의 이야기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또 한 번 내 선택에 의미를 더해 주었어. 가장 큰 영감을 준 몇 구절을 들려줄게.
"현재가 미래와 어떻게든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현재가 미래로 연결 된다는 믿음이 가슴을 따라 살아갈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모든 차이를 빚어냅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때, 진심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상기하면, 외부의 기대나 자존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모두 없어지고, 정말로 중요한 것만 남게 됩니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언가 잃을 것이 있다는 생각의 덫을 피할 수 있고 마음을 따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기를 내어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은 여러분이 진정 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퇴사한 이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생의 태도, 여러 선택지 가운데 읽고 쓰는 삶을 택한 이유, 앞으로 나아가려는 방향. 모두 위 문장들로 설명할 수 있어.
“왜 일하는가”란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과 연결되었고, 그 질문에 대한 집착이 퇴사와 도전이라는 결심으로 이어진 거야. 단 한번 주어진 삶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서서히 시들어가는 나로 남지 않고 마음을 따라 진정 되고자 하는 나로 되어가기 위해.
내가 다닌 직장들, 내가 한 일이 왜 나에게 맞지 않았는지, 왜 그 일들을 사랑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몇 페이지도 넘게 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어떤 계기로 진심으로 퇴사를 고려하게 되었는지, 마지막 순간 어떻게 용기 낼 수 있었는지.
진심으로 퇴사를 고려하게 된 순간은 바로 직장생활 동안 나를 겨우 붙잡아준 자기 연민이 어느 순간 자기혐오로 바뀐 걸 알아차린 순간이야.
조직과 주변 동료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임계점을 넘은 후부터, 나는 나 자신을 점점 더 견딜 수 없게 되었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사람들과 상황을 바꾸려고 용기 내지 못하는 내가 싫었고, 이해할 수 없는 구조와 의사결정 아래에서도 남들처럼 뻔뻔하게 살지 못하는 내가 싫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믿는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나를 소진시키는 내가 싫었어. 그리고 작년 늦은 여름 어느 날, 어느새 혐오하는 대상들에게 물들어, 그들과 비슷한 사고를 하고 있는 나를 알아차렸고, 그 순간 내 온몸이 떨렸지. 그때만큼은 정말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어. 물론 이 감정들은 나의 주관적 판단일 뿐, 객관적으로 누가 무엇이 옳다, 낫다고 볼 수는 없어.
마침내 올해 1월, 최종적으로 퇴사를 결심할 때 용기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잡스의 메시지처럼 ‘선택’의 의미와 점들의 연결과 흐름을 믿었기 때문이야.
‘선택’에 대한 내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한 김영하 작가님의 말을 들려줄게.
“우리 모두 자기 인생의 작가이다. 우리는 최소한 그 이야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이야기를 편집하는 과정의 결합이다. 인생 소설은 계속 변화한다. 자신이 믿고 원하는 이야기대로 선택을 내리고 사건을 재구성해야 한다.”
OO, 난 타인의 소음에 의한 선택이 아닌, 나 자신이 진정으로 믿고 원하는 대로 내린 선택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진다고 믿어. 특히, 중요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린 선택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야만 자기 인생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Connecting the Dots.”
OO, 내가 지나온 경험과 선택, 인생의 점들이 어떤 모양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이 순간 내가 그 점들을 어떤 의미로 연결하고 어떤 흐름을 만들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
전화위복이랄까, 자기 연민에 기댄 시간, 자기혐오와 싸운 시간은 오히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밑바탕이 되었어. 또, 일하면서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문화를 버티며 타자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힘을 키웠어.
이렇게 내가 일하면서 찍어온 점들은 나의 다채로운 점들과 연결되었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온 시간, 사람과 사회에 대해 품어온 궁금증과 문제의식, 내향적이고 예민한 기질, 이타적인 마음 등. 이 연결점으로부터 읽고 쓰며 세상을 더 다정하게 만드는 미래로 흘러가보려고 해.
사실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무척 조심스러워. 각자의 상황이 다르고, 결국 자신의 선택은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으니까. 퇴사 계기, 선택과 관련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거의 하지 않는 이유야. 게다가 내 퇴사 이야기는 다소 무겁고 비장하게 표현하게 돼. 두 아이를 키우는 30대 후반 직장인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커리어 로드맵이나 재정 상황, 퇴사할 때 주의사항 등 실질적인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만, <엮은이 닷노트> 편지에는 진솔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 혹시 이런 부분도 궁금하다면, 답장을 보내거나 담벼락에 글을 남겨줘. 내 경험을 최대한 자세히 들려줄게.
OO, 짧게는 2주 동안, 길게는 한 달 동안 내 편지를 받아 주어서 진심으로 고마워. 내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내게 정말이지 큰 힘을 줘. 나도 좋은 글을 써서 OO에게 힘이 되고 싶어. 계속 노력하고 온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쓸게. 우리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엮어질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럼 또 편지 쓸게. 내 글이 OO 인생 이야기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다정한 하루 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