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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Oct 25. 2024

다섯 번째 편지 - 2023년 11월 29일

다정함

OO, 안녕? 11월 말 어떻게 보내고 있어? 오늘 저녁은 11월 같지 않게 날이 너무 추워서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 같아. 심지어 잠깐 눈까지 흩뿌리더라. 11월에 내리는 눈이라니. 잠깐 손발은 시려도, 마음은 따뜻한 하루 보냈기를 바라.



지난주 편지에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썼어. 어떻게 전달되었을지 모르겠어. 한 엮은이는 담벼락에 짧은 글을 남겨주었고, 또 한 엮은이는 비밀 답장을 보내 주었어. 엮은이들의 이야기는 참 다정했어. 비밀 답장에는 그동안 내 편지가 조심스럽게 경계선을 지키는 느낌이었는데, 지난주 편지는 경계 넘어 내 세상을 조금 보여준 것 같아 답장을 하고 싶었고, 마음에 닿은 이야기가 많아 나의 선택이 부럽기도 하고 응원하게 된다는 말이 담겨 있었어.


편지를 쓰면서 들었던 쓸데없는 날 선 생각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답장이었어. 실은 막상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쉽지 않아서 용기 내고 있었고, 내 진심이 잘못 전달될까 염려도 많이 했거든. 마침 편지를 한 달 동안 발행하면서 느낀 점을 어제 인스타에도 올렸어.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건 내 편지를 받아주는 OO에 대한 고마움이야. OO에게 감사한 마음 소중히 간직할게. 



지난주 목요일에는 오랜만에 한나절 넘게 밖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어. 곧 결혼하는 고등학교 친구도 만나고, 연남동 독립서점 두 곳도 둘러보고, 황보름 작가님의 북토 크도 다녀왔어. 여러모로 무척 충만한 시간이었지.


6월쯤부터 나를 위한 오롯한 나만의 하루, ‘영감데이’를 한 달에 한 번 보내기로 했어. 줄리안 카메론의 책 『아티스트 웨이』에 나오는 ‘아티스트 데이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


“창조성 회복을 위한 중요 도구 2가지는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이다. 창조성을 일깨우기 위해 이 두 가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지난 4월 퇴사 후 회사 다닐 때보다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어. 일과 육아로 내 일상이 단순하게 순환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았지. 그런데, 뭔지 모르게 계속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 있는 것 같았어. 직장 생활 동안 부서지고 갈라진 무언가가 내 안에 남아 있었어. 그래서 이 응어리를 치유할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조금 건방지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예술적인 인풋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영화, 음악, 미술, 전시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며 영감을 받고, 낯선 환경에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거야. 8월에는 류이치 사카모토 전시회와 공유 서재 마이시크릿덴에 다녀왔고, 10월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 혼자 다녀왔지. 



지난주 목요일도 바로 ‘영감데이’였어. 이 편지를 한 달 동안 발행한 걸 스스로 축하하고 싶어 일정을 미리 잡아 두었어. 연남동의 <어쩌다 책방>은 정말이지 맘에 드는 곳이었어. ‘우연과 상상의 장소’라는 콘셉트로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런 서점이 가까이 있다면, 매주 들릴 것 같이 근사한 서점이었어. 최근 독립서점 창업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공간이었지.


서점에서 한참 여러 책을 살펴보고 세 권을 구입했는데, 그중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는 운명처럼 만난 책이었어. 작가의 소설 작품은 한 권 읽어본 적 있었지만 이 책은 미처 들어보지 못했지. 제목을 보자마자 사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책을 훑어보면서 이 책이 내 인생책이 되겠다는 직감이 들었지. 심금을 울리는 구절이 많은데, 책 마지막 장에 수록된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기조 강연 중 깊이 공감했던 몇 문장을 OO에게 들려주고 싶어.



“다정함이란 대상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감정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낼 줄 아는 기술입니다.”
“다정함이란 가장 겸손한 사랑의 유형입니다. 성서나 복음서에도 언급되지 않고, 이것을 걸고 맹세하는 사람도 없으며, 인용하는 사람도 딱히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특별한 로고나 상징물도 없고, 범죄나 질투를 유발하지도 않습니다.”
“다정함은 자발적이면서 사심이 없습니다. 연민에 기반한 동질감을 초월하는 감정으로서 다소 멜랑콜리한 듯하지만 의식적으로 운명을 공유합니다. 다정함이란 다른 존재, 그들의 연약함과 고유한 특성, 그리고 고통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그 존재들의 나약한 본질에 대해 정서적으로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엮은이 닷노트>를 시작할 때 이 편지를 ‘다정한 편지’라고 소개했어. 몇 달 동안 나 자신을 탐구하면서 나를 약하게도 강하게도 만드는 가장 나다운 정서가 다정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떠오르더라. 네다섯 살쯤, 우리 집 베란다의 쥐덫에 걸린 쥐에게 과자를 주면서 아프지 말라고 내가 돌봐주었대. 학창 시절에 따돌림당하는 친구들을 남모르게 챙기기도 했고. 회사에서도 적응 속도가 느리거나 은근히 무시받는 동료 선후배들의 일과 생활을 챙기곤 했지.


OO에게 다정한 편지를 쓰고 싶었고, 다정한 엮은이들을 만나고 싶었어. 그렇지만 다정함이 어떤 것인지, 왜 중요한지 내 생각을 선명하게 글로 풀어내지 못했어. 그리고 서점에서 이 책을 만났지. 올가 토카르추크가 말한 것처럼 다정함은 ‘사심 없이 상대방의 나약한 존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해. 어떻게 보면 온라인으로 알게 된 피상적인 관계로 그칠 수 있는 사람들 중, 내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까지 감정을 공유하고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는 OO를 만나고 싶었고, OO의 존재와 본질에 관심을 갖고 싶었어. 



지난주에 가족을 위한 시간을 많이 보냈어. 첫째와 둘째가 함께 옮겨 갈 어린이집에 다행히 입소 확정되어서 관련 일들을 처리했어. 또, 이번 주 금요일이 아내의 복직일이다 보니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어. 월요일엔 아내와 첫째랑 데이트를 하고, 오늘은 아내와 둘째랑 데이트를 했어. 아이들은 당분간 엄마 없는 아침과 저녁에 익숙해져야 하니 엄마의 사랑을 듬뿍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 내일은 아내랑 단둘이 영화를 보기로 했어. 정말 몇 년 만인지. 아내는 거의 5년 만에 회사로 돌아가는 거라 아내에게도 고마운 마음과 응원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어.


OO, 실은 지난주에 둘째 어린이집 생활 관련해서 마음 아픈 일이 있었어. 혹시 걱정할까 봐 말하자면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야. 사실 잘 알고 있어. 아주 조금씩만 다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리 아이가 이런 일을 간접적으로 겪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꽤나 쓰려. 그저 둘째를 더 사랑하기로 했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조건 없는 사랑과 따뜻함을 주는 거니까. 그 일을 겪은 후 아내와 긴 대화를 나누며 함께 결심했어. 우리 일은 좋은 게 좋은 걸지 몰라도 아이들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기로.



OO, 바라지 않는 삶의 곡절이 마음 깊은 곳에 쌓여 갈수록,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생각과 내 행동뿐인 걸 느껴. 


OO, 우리가 보는 세상을 우리가 직접 그려 나가자. 우리 마음에 변하지 않는 ‘다정함’이라는 뿌리를 내리고, 세상의 가시를 포근히 감싸 안아 그 안의 독을 조금씩 치유하자.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내 편지가 OO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아물게 돕는 것.


다음 주에 또 편지 보낼게. 다정한 하루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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