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제 Oct 25. 2024

여섯 번째 편지 - 2023년 12월 7일

멜랑콜리

다정한 OO에게,


OO, 안녕? 12월 첫 주 잘 보냈어? 지난주보다 조금 덜 추워서 좋았어. 갑자기 추워지면 아이들 신경이 많이 쓰이거든. 심술궂은 하늘은 따뜻한 공기에 뿌연 먼지를 담아 보냈지만.



지난주 편지에 썼던 것처럼 아내가 회사에 복직했어. 집안일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두 아이를 아침에 혼자 달래고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등원시키는 일은 조금 힘들더라. 두 돌 갓 지난 둘째는 아직도 아침에 엄마를 찾아서 걱정도 되었어. 아이가 아침에 힘들면 어린이집에서도 힘들까 봐.


예상대로 우리 사랑스러운 아들은 나흘 연속 아내가 출근하자마자 아침 일찍 잠에서 깨고 말았어. 엄마가 없는 걸 어떻게 느꼈는지, 엄마 향이 나야 푹 자는 건지. 일어나자마자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어. 어제 아침엔 첫째 딸까지 일찍 깨서 엄마가 없다며 갑자기 울었어… 후… 순간 큰 한숨이 나왔지. 그래도 이제 내가 아이들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기 때문인지, 큰 스트레스받지 않고 아이들을 달래고 챙기게 되더라.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OO, 지난 편지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 “바라지 않는 삶의 곡절이 마음 깊은 곳에 쌓여 갈수록,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생각과 내 행동뿐인 걸 느껴.”(밤에 글 쓰면 꼭 이런 느끼한 표현이 나오더라!!!)


내 생각을 내가 선택한다는 건 소위 자기계발서에도 많이 나오는 말인 것 같아. 꿈을 이루기 위해 원하는 바를 반복적으로 말하거나 글로 쓴다거나, 부자가 되기 위해 부자가 된 상상을 시각화해야 한다는 것처럼. 나는 자기계발서를 거의 보지 않고 사실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퇴사 후 마인드를 바꾸고 싶어서 유명한 자기계발서 몇 권을 읽어 보았어. 읽을 때는 괜찮은 내용도 있었는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내 마음속에는 남아있지 않더라.


올해 여름 읽었던 책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책은 바로 두 번째 편지에서 언급했던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의 설계자이므로 각자 감정과 삶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메시지. 이 메시지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강력한 주문으로 작동하고 있어. 덕분에 내 감정과 경험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스스로 내 삶을 설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이 말은 모든 상황을 단순히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내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는 말인 것 같아.


육아를 반전업(?)으로 삼게 된 지금, 의식적으로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우리 가족에게도, 내 일에도 도움이 되는 상황이라고. 예를 들어, 아침에 아이들이 심하게 울며 떼를 써도 “아이들이 언젠가 겪어야 할 성장통이다, 다른 발달 단계를 다 잘 넘어온 것처럼 이 상황도 잘 적응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고 아빠인 내가 옆에 있는 게 다행이다” 이런 식으로. 심지어 어제 아침 아이들이 동시에 울 때 “오! 좋아 이거 좋은 글감이다.” 이런 생각도 들더라.



OO, 나의 회사 생활을 돌아볼 때 가장 아쉬운 점이 이런 사고방식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야. 어쩌면 회사생활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까지! 항상 주어진 상황과 타인의 자극을 받아들이기만 했고, 힘들거나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나 자신을 책망하곤 했지. 수많은 감정과 경험을 나를 위한 방향으로 해석하지 못했어. OO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내 회사 생활 이야기를 좀 해볼게.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성격 탓이 가장 큰 것 같아. 어느 정도 강제로 사회화되어서 그럭저럭 외향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사실 엄청난 내향인이라서…(대문자 I라서 겪은 에피소드는 끝이 없지…) 회사에서 주변 사람의 감정에 큰 영향을 받았고, 에너지의 방향이 내 안으로 향하는 편이라 어떤 일이 있을 때 나 자신을 탓할 때가 많았어. 내향성이 장점이 되는 경우도 많을 텐데 그런 관점으로 나를 전혀 바라보지 못했지.


직장인 중에 내향인의 비율도 꽤 높을 텐데 나는 왜 유독 힘들었던 걸까? 이 이유에 대해서 몇 달 동안 종종 떠올려보곤 했어. 내 문제인가? 내 잘못이 아니라 내 상황이 특별했던 건가? 나보다 힘든 사람도 더 많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내 상황이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가 고장 났기 때문인 것 같았어. 여러 가지 이유를 찾았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나약함’과 ‘정직함’인 것 같았어.


내가 본 회사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만났을 때 대부분 세 가지 선택을 했어. 동화되거나, 모른 척하고 신경 쓰지 않거나, 앞에선 따르고 뒤에선 욕하거나. 나는 이중 아무 선택도 할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겪은 아픔과 그 결과로 느낀 허무함은 모두 내가 유별난 탓이라고 스스로 짐을 지었어. 차별을 묵인하는 사내 문화에 의문을 보였을 때도, 비리를 저지르는 상사에게 바른말을 했을 때도, 일은 하지 않고 사내 정치에만 매달리다가 남 탓만 하는 상사들 앞에서 분노할 때도. 보통 직장인 다운 선택은 할 수 없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비겁하게 정직했고, 비겁하게 정직한 나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약했어.



어제 오전, 집 근처의 한 공유서재에서 시간을 보냈어. 마침 그곳에서 욘 포세의 책 『아침 그리고 저녁』을 훑어보다가 내 성향을 잘 나타내는 ‘멜랑콜리커’라는 개념을 만났어. 예전부터 내가 멜랑콜리한 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막상 내 깊은 곳을 들여다볼 때는 나에 대한 단어로 떠오르진 않았어. 이상하지. 책을 번역한 박경희 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요한네스를 비롯한 욘 호세의 인물들은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자유, 외로움 등 존재하지만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묻는다”면서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존재의 불안을 끊임없이 사색하는 멜랑콜리커들”이라고 말해.


‘멜랑콜리커’는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전진하는 대열에서 멈춰 주변을 돌아볼 줄 알고, 정서가 우울하고, 모호하게 말하는, 과잉소비사회와 자본주의에 반하는 인성의 사람으로, 문제의 표면이 아닌 핵심을 파고들며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이며 “그들은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고민하며, 사후세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야.



조금 다른 관점의 설명이지만, 책 『멜랑콜리아』의 저자 김동규 님은 멜랑콜리커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어. “멜랑콜리의 기질을 많이 가진 사람을 ‘멜랑콜리커’라고 한다. 우울과 슬픔을 자주 느끼고 민감한 사람인데, 멜랑콜리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이유 없는 슬픔 : 멜랑콜리를 일으킨 대상 또는 원인은 불분명

2. 부끄럼 없는 자기 비난 : 양가감정, 동일화

3. 검질긴 불안, 권태, 고독 : 죽음 의식

4. 극적 반전 : 조울, 천재와 광기 

5. 상실감, 총체적인 무력감, 종국에는 자기 상실


OO, 혹시 걱정하지는 마! 위 설명 중에 조울, 종국에는 자기 상실 같은 말들은 나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아!



‘멜랑콜리커’처럼 회사 생활 동안 내가 항상 찾아 헤맨 건 이유와 의미였어.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려고 노력했고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밖에 없었어. 왜 이렇게 일하지? 저 사람은 왜 저러지?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어야만 하지? 이 일의 의미가 뭐지? 우리 조직은 왜 존재하는 거지? 이런 의문이 항상 내 곁을 맴돌았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중요한 건 나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지 못했어. 이 사람(상황)이 왜 저러지가 아니라 이 사람(상황)이 나는 왜 불편한지 물었어야 했고, 나를 탓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질문해야 했어. 만약 그랬다면, 내 회사 생활이 한결 의미 있었을 것 같아.(물론 그래도 퇴사는 했을 거야!) 당분간 이런 나의 멜랑콜리커적 기질을 어떻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찾아보려 해.



OO, 혹시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어? 혹시 복잡한 이유로 회사 생활이 힘들게 느껴진다면, OO 자신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져서, 회사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설계해보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일, 직장과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직접 감각하는 모든 상황에서 효과가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유일하게 우리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생각. 부디 OO 자신을 위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면 좋겠어.


이번 겨울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었으면 하는 이상한 마음이야. 붕괴, 탈피, 치유, 휴식, 도전, 열정, 안정으로 이어진 2023년, 이 겨울 끝에 내가 어떤 길을 가게 될지가 너무 궁금해서. 기대할 수 있고 노력할 수 있어서 감사한 이 겨울이 그 어느 해 겨울보다 소중하고 특별해서. OO에게도 소중하고 특별한 2023년 겨울이 되면 좋겠어.



다음 주에는 정말로 좀 부담 없는 글을 써야겠다. 매번 너무 진지한 것 같아서 쑥스럽네. 글은 또 왜 이렇게 길게 쓰는지. 좋은 글은 말하는 글이 아니라 보여주는 글이라던데 계속 말만 하고 있네. 꾸준히 연습해 볼게…!


다음 주에 또 편지 보낼게.


그럼 OO, 오늘도 내일도 다정한 하루 보내기를.

이전 05화 다섯 번째 편지 - 2023년 11월 29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