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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Oct 24. 2024

두 번째 편지 - 2023년 11월 8일

감정

 OO 안녕?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냈어? 따뜻한 날이 계속되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비바람이 불며 날이 추워졌어. 오늘도 바람이 차가웠는데 OO 컨디션은 괜찮았는지 모르겠어. 어제 새벽에는 기온이 거의 영하에 가깝더라. 어느덧 겨울이 바로 앞에 다가온 느낌이야.


 겨울이 가까워지면 준비할 게 참 많아. 혼자일 땐 몰랐는데, 결혼하고 아빠가 되니까 겨울을 나기 위해 미리 챙겨야 할 게 많더라. 내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게 소박한 행복감을 주기도 해.



 지난 주말 오랜만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 여행을 다녀왔어. 아내가 거의 5년 정도 긴 휴직을 마치고 곧 회사에 복직할 예정이라 다 같이 여행을 떠났어. 여행 중간중간 계속 지난주에 OO에게 보낸 첫 편지가 떠올랐어.


 사실 첫 편지를 보낸 후 복잡한 감정을 느꼈어. 내 글을 구독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과 감사함. 내 글이 볼품없지 않을까, OO를 실망시킨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불안. OO는 내 편지를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궁금함. 글을 쓰고 보낼 때까지 이어지는 즐거움과 만족감. 처음으로 본격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성취감. 괜한 일을 벌인 건 아닐까 하는 염려.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이 몰려왔지만 한편으로는 고생했다고 나 자신을 토닥여주고 싶었어.


 복잡한 마음 때문일까? 첫 편지를 보낸 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어. 한참을 누워있어도 생각이 멈추지 않았어. 혹시나 잘못 쓴 부분은 없는지,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아 이렇게 쓸 걸, 아 이렇게 쓰지 말 걸 스스로를 계속 괴롭혔지.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보았을 때가 새벽 두 시 사십 분쯤이었던 것 같아.

 

다음날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집 앞 공원에서 산책을 했어. 어젯밤 여운이 계속 남아 여전히 생각이 많았지. 상쾌한 노래라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싶어서 노래를 틀었어. 그렇게 터벅터벅 걸으며 몇 곡쯤 들었을까? 바로 이 노래가 나왔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


Mia - Audition(La La Land)


 OO, 혹시 영화 <라라랜드> 봤어? 이 장면은 주인공 미아가 배우 오디션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데, 영화 흐름에서도 꽤 중요한 장면이야. 미아의 서사가 급격하게 전개되는 순간이지. 미아는 배우의 꿈에 도전하기 위해 수많은 오디션과 무대에서 다른 누군가의 모습만을 연기했어. 온 마음을 다해 준비한 일인극도 비참하게 실패하지. 그리고 마지막 도전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오디션에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노래해. 모든 조명이 꺼지고 어떤 효과도 없이 노래 부르는 미아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 차. 관객들은 미아의 절실함을 그대로 느끼며 함께 먹먹함에 빠져 들지.


 영화 내에서 이 장면의 의미도 감동적이고 중요했지만 난 노래 가사를 참 좋아했어. 자신의 꿈을 위해 무모한 도전에 나선 사람들을 위한 노래인데, 시적인 표현과 절절한 이야기가 마음을 울렸어. 미아의 이모 이야기라고 하지만, 미아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아마 그날도 가사 내용 때문에 노래를 듣다가 눈물이 난 것 같아. 몇 구절만 써볼게.


Here’s to the fools who dream
꿈꾸는 바보들을 위해서

Crazy, as they may seem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겠지만

Here’s to the hearts that break
부서진 마음을 위해서

Here’s to the mess we make
망가진 것들을 위해서

 

지나게 감정 이입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퇴사한 내 모습이 지독한 감기에 걸릴 줄 알면서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센 강에 뛰어드는 이모, 그리고 미아의 모습과 겹쳐 보였어. 첫 편지를 보낸 순간이 이런 감정까지 이어지다니 나도 참.



OO, 혹시 그런 생각해 본 적 있어? 우리 마음속 감정은 어떤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을까? 사람마다 감정의 기본값이 다른 건 왜 그런 걸까? 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첫걸음을 잘 내디딘 건데 왜 다음 날 아침 산책하다가 혼자 청승맞게 눈물을 흘릴까?


 내 마음속에는 감정 조절 장치가 있는 것 같아. 기준치를 넘는 감정이 발생하면 바로 작동하는 장치. 이상하게 침울한 감정에는 제한이 없는데, 신나는 감정은 기준치 바로 위에 제한이 걸려 있는 것 같아. 플러스 10부터 마이너스 100까지라고 할까?


항상 그랬던 것 같아. 대학에 붙었을 때, 취직에 성공했을 때, 꿈꾸던 올림픽 개막식에 입장할 때, 크고 작은 기쁨을 충분히 즐길 법도 한데 즐겁고 행복한 기분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어. 금세 걱정과 불안이 올라오면서 내 감정은 기본값으로 돌아가게 돼.(아이들이 태어난 때는 이 장치가 고장 났는지 행복감이 리밋을 뚫고 100까지 올라갔다 오더라!) 다행인 건 특별한 스트레스가 없을 때, 즉 감정이 기본값일 때는 1에서 3 정도 사이에 머무르는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안온한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마이너스 50 정도 밑으로까지 내려갈 때는 거의 없다는 점이랄까?


나의 감정 스펙트럼은 왜 이렇게 나누어져 있을까? 내향적인 사람이라 감정 수용도가 높아서 그런 걸까? 자라며 겪은 어떤 성장 환경이나 트라우마 때문일까? 사춘기 때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어떤 압박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선비나 군자처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 기질이, 인간의 본성이 원래 우울함에 가까운 걸까? 몰라. 나도 정말 이유를 모르겠어.


이런 감정 사이클을 겪으며 확실하게 깨달은 건 있어. 추락하는 감정을 더 가속시키면 어떻게든 바닥을 치고 올라온다는 것. 이걸 알고 난 후 마이너스 50에 가까운 날에는 일부러 우울하고 슬픈 노래를 듣거나 슬픈 영화를 보기도 해. 그러면 감정 조절 장치가 분주하게 돌아가서 내 감정을 기본값으로 돌려놓지. 이 점 역시 다행인 것 같아. 어두컴컴한 심해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든 햇볕 드는 수면 가까이 올라온다는 점.



올해 4월 퇴사한 후에 가장 나를 바꾸려고 가장 노력했던 것도 바로 감정 관리야. 퇴사나 도전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아니라, 떠난 곳, 남겨둔 사람들에 대한 여러 생각에서 비롯된 모순적인 감정들이 깊어져 나를 흔들 때가 많았거든. 가령 ‘나는 왜 그렇게 나를 불태우며 일했을까, 손해 보면서까지’, ‘내 선택이 그들을 버리는 선택인 것인가’,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대했는데, 그들은 왜 나를 이렇게 떠나보내는 건가’와 같은 생각들.


 감정에 대해 공부하던 중, 내 관점이 완전히 변한 계기가 있었어. 바로 리사 펠드먼 배럿 박사의 책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과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읽은 일이야. 중요한 메시지가 정말 많은데 특히 와닿은 메시지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의 설계자’이므로 각자가 감정과 삶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야. 이 책들을 읽은 후 내 감정과 경험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 삶을 설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OO, OO의 감정 기본값과 감정 스펙트럼은 어떤 것 같아? 혹시 ‘감정’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 있어? 나를 사랑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을 테지만, 내 감정을 잘 이해하는 건 나를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길이고 그 길은 나를 사랑하는 길로 이어지는 것 같아. 그리고 배럿 박사의 말대로 내 감정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우리는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겠지.


OO, 이 나이에 혼자 산책하다가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를 쓴 게 좀 부끄럽다. 막상 글을 다 쓰니 창피하네. 새로운 시작은 과거의 나를 버린다는 뜻이고, 진심으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또 내 꿈을 스스로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하려고. 다음에도 이런 순간에 또 눈물이 나면 그때는 오히려 기분이 좋을 것 같아.


A bit of madness is key to give us new colors to see
Who knows where it will lead us, and that’s why they need us.
So bring on the rebels, the ripples from pebbles, the painters and poets and play.


OO, 결국 우리 인생은 각자의 의미대로 고유한 이야기가 되어 빛나는 게 아닐까? 지금 나의 도전이, 약간의 미친 짓일지라도, 지금 이 길 위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 OO의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몰라도 우리 같이 조금만 더 우리의 하루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 보자. OO의 이야기 속에 내 이야기가 스며들기를 바라면서.


 그럼 또 편지 쓸게. 오늘도 내일도 다정한 하루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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