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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원 Jun 01. 2024

낮과 밤이 뒤바뀐 시간

나의 장편 소설 부활 프로젝트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0과 1만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0과 1 사이에 무수히 많은 숫자가 존재하지만,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중간이 없다. 나는 항상 디지털의 세계는 결과 중심의 세계라는 생각을 했다. 0.5나 0.6은 필요 없다. 오직 1이거나 아니면 0이다. 


물이 끓기 위해서는 100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1이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엄청난 추진력으로 이륙에 성공해야 하고 이것이 1이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고, 나의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어도 완결된 이야기로 완성되지 못하면 1이 아니다. 내가 들인 노력이 0.99라고 하더라도 완결되지 못하면 그냥 0인 것이다. 


소설의 모든 이야기 구조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는 소설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오직 글만 썼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기 전까지,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하는 것과 간간히 화장실에서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는 것뿐이었다. 


밤에 자야 하는데, 이야기 진행에 탄력이 붙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그렇게 피곤해서 잠이 들 때까지 계속 글을 쓰다 보니 점점 자는 시간이 늦어졌고 결국에는 아침에 잠이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낮과 밤이 바뀌었고, 대략 그런 시간이 한 달 정도 지속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런 생활이 가능했는지 그 정신력도 믿기 어렵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체력이었다. 소설을 끝내지 않는다고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고, 벌을 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이 소설을 끝내지 않으면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탈고하는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고, 마침내 완성을 시켰다. 이때 완성된 소설의 결말로 몇 년 후에 제1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소설을 정식으로 발간하면서 결말도 바뀌고 내용도 더 늘어났지만, 처음 탈고했던 결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소설을 완성하고 작가 친구 H에게 보낸 메일을 검색해 봤다. 나의 기억보다는 조금 더 일찍 탈고했었다. 2010년 9월 20일. 처음 보냈을 때의 소설 제목은 '나의 옛 애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뭔가 015B의 노래 제목 같다. 

작가 친구에게 탈고된 원고를 보낸 메일 캡처


세상 사람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소설 탈고였지만 이때의 경험은 의미가 컸다. 무엇인가 혼자 힘으로 완성을 해본다는 기쁨을 맛보았다. 회사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을 때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정말 친구의 말처럼 노트북 한대로 혼자서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책을 한 권 써낸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마라톤 경기가 42.195Km를 달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마라톤을 완주한다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 안다. 마침내 0.99의 노력을 1이라는 결과로 만들어 낸 경험은 내가 앞으로 작가로서, 창작자로서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2010년 9월, 그렇게 낮과 밤이 바뀐 세계는 나에게 1이라는 숫자를 안겨주고 저만치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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