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거제도다. 내가 태어난 곳이자,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태어난 곳이다. 심지어 남편과 시부모님이 태어난 곳도 거제도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서 씨 집성촌이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서 씨였고, 어린 나는 세상에서 서 씨가 가장 흔한 성씨인 줄 았았다. 거제도 초등학교에서도 반에 서 씨 친구들이 많았지만, 도시로 전학 와서야 서 씨가 흔치 않은 성씨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거제도의 농촌 마을은 아무 걱정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밖으로 나가 놀기 바빴다. 마을 곳곳엔 늘 아이들이 있었고, 놀이는 무궁무진했다. 장난감은 없었지만 흙, 돌멩이, 나뭇잎, 열매 등 무엇이든 장난감이 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뛰어놀고 먹는 보리밥과 된장국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전학을 가며 세상은 달라졌다. 도시의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도 학원에 가고 과외를 받았다. 시험기간에는 밤을 새우며 공부를 했고 시험 성적으로 등수가 매겨졌다.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심지어 부모님이 자주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주목받았다. 자연스레 나는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관심받지 못한 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고슴도치처럼 날카롭게 세우며 살았다. 겉으론 강한 척했지만, 속으론 늘 주눅 들어 있었다. '촌년 가시내'인 것이 들킬까 봐 두려워하며 자신을 감췄다.
거제도에서는 모든 날이 특별했고 나는 존재만으로 특별한 사람이었다. 도시에서는 늘 줄을 서야 했고, 앞줄에 서지 못하면 별것 아닌 존재가 되었다. 고향을 떠난 후로 늘 천국 같던 거제도를 그리워했다.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 나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거기 있었다.
하지만 그 환상은 남편을 만나며 무참히 깨졌다. 거제도 출신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거제도는 내가 꿈에도 그리워하던 고향이 아니라 시댁이 되어버렸다.
제사와 명절 때마다 가서 허리가 휘도록 일만 하는 곳. 주말에 가면 남편은 꼼짝도 하지 않고 TV를 보는데, 나는 종일 서서 삼시 세끼를 차려야 하는 곳. 내 고향마을은 시댁 옆 동네였지만, 늘 시댁만 들렀고 고향에는 발길조차 닿지 못했다. 거제도로 가는 이유는 시댁 때문이었고, 관광이나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거제도 가는 것은 피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시간이 한참 지나, 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찾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외지인들이 들어와 새로운 집들이 많이 생겨 있었다. 바닷가에는 펜션이 쭉 들어서 관광지로 변해있었다. 나의 고향집도 사라져 버렸고 고향은 다른 마을이 되어 있었다. 내가 뛰놀던 개울가도, 정자나무 아래도, 고즈넉한 바다도 이제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고향은 더 이상 내가 발 딛고 설 수 있는 물리적 장소가 아니었다. 고향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같은 기억, 아무 걱정도 없이 살았던 순간들,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들이 모여 만든 나만의 천국이었다. 지금의 고향 거제는 낯설게 변해버렸지만 내 마음속의 고향은 여전히 따뜻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나는 곳이다. 그 고향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