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서른 후반의 미혼여성.
결혼과 출산에 뜻이 없고, 정확하게는 출산에 뜻이 전혀 없고, 결혼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연애는 곧잘 하고 있지만 나에게 결혼을 하자며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이가 없었으니 결혼을 안 한 것보단 못한 게 맞지 않을까.
무자녀에 대한 생각을 시작한 건 이십 대 후반이었다. 오랜 기간 교제해 온 남자가 있었으며 이 사람과의 연애에 대한 결말에 대해 종종 생각했다.
'결혼?', '이별?'
결혼을 할 수도 있겠다며 미래를 그려보았다. 이별을 할 수도 있겠다며 그 또한 미래를 그려보았다. 다만 결혼과 이어질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나의 모습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아니 그리고 싶지 않았다.
계획불가다.
그 당시의 연인은 딩크족이 아니었다. 몇 번의 대화 끝에 가족 구성원에 대한 생각은 조율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연인으로 보내온 시간을 칼같이 정리하진 못했지만 조율할 수 없는 문제를 서로의 가슴에 품고 조금씩 멀어지다 이별하게 되었다.
서로의 결말은 이별이었다. 이별 후 생각했다. 나는 단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 사람과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걸까.
잘모르겠다라. 그래서 내가 딩크족희망자란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딩크족희망자가 되었다.
친언니가 아이를 낳아 기르니 나에게도 조카가 생겼다. 조카는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다. 신나게 노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함께 놀기도 한다. 그러다 아이가 악을 쓰고 울면 아이의 부모가 달려와 그를 달랜다.
이것이 조카를 사랑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이유였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이 무척이나 대단하고 숭고한 일임을 알아버렸다. 부모가 아이를 낳고 양육한다는 건 아이의 온 우주가 되겠다는 결심이다. 아이를 위해 자신의 감정과 신체적인 노동과 경제적인 지원을 끊임없이 들여야 한다. 그것이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대가인셈이다.
여동생이 몇 달 전 출산을 하며 세 번째 조카가 생겼다. 가끔 영상통화로 아이의 얼굴을 보며 안부를 묻기도 한다. 자그마한 아기가 신기하고 예뻤다. 동생의 모습은 초췌했지만 그래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통화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동생의 몸이 잘 회복되기를 기도했고, 아이가 아프지 않고 잘 자라기를 응원했다.
어느 날 동생에게 메시지가 왔다. 짐이 한가득인 사진과 '나 지금 집에 간다'란 텍스트가 적혀있었다.
'?'
당분간 아기와 친정에 와있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잠시 당황했고, 조심히 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요즘 나의 근황을 짧게 이야기하자면 회사를 그만두고 자취생활을 정리하고, 본가로 돌아왔다.
나의 본가는 여동생의 친정집이다. 집에는 엄마와 나와 남동생이 살고 있으며, 엄마와 남동생은 직장인이고, 나는 백수이다. 그러니 당분간 이 집에서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낼 이는 나와 여동생과 아기였다.
예상치 못한 아기와의 동거, 아니 예상치 못한 공동육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