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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Mar 21. 2024

우리는 왜 여기서 만나게 됐을까

새해 첫날 아침, 나는 새소리만 들리는 한적한 공터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한데 뭉쳐 자동차 한 대를 밀고 있었다. 운동회 청백대항 줄다리기만큼이나 온 힘을 다해 힘을 줬지만 차는 헛바퀴만 돌리며 진흙을 뿜었다. 나와 남편은 옆 고랑에 처박혀 있는 우리의 K3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검은색 SM5의 눈밭탈출을 염원하며 함께 기합소리를 냈다. 온몸을 차체로 기울이며 어떤 인연으로 일면식도 없던 이들과 한몸처럼 엉켜있게 된 건지 그 이유가 자꾸 궁금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해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다. 이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들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집에서 멀지 않은 한강공원에 해돋이 스팟이 있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7시에 집을 나섰는데 한강으로 빠지는 좌회전 차선이 꽉 막혀있었다. 평생 신년 일출을 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들조차 차를 끌고 나왔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돋이를 보러 왔을까. 해돋이 관람 초보들이 차에 갇혀 이런 상황을 예측 못한 서로의 안일함을 질책하는 동안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일출까지 이제 10분 남짓. 그때였다. 기다란 행렬에서 이탈해 샛길로 빠지는 차가 보였다.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왕 실행한 일이라면 뭐라도 결과를 보고 싶은 남편이 샛길로 차를 틀었다. 창고 사이에 끝없이 펼쳐진 눈밭. 여기다. 기적적으로 시간에 맞춰 해냈다는 성취감에 들떠 깔깔거렸다.


동쪽을 향해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서있는 사람들 사이에 합류했다. 구름에 안개마저 심해 언제든 확고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월드타워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새해 첫날이 아닌가. 해가 구름 사이로 잠깐이라도 인사를 해줄지 모른다고 낙관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두근두근. 산 위로 불그스름한 빛이 희미하게 번졌다. 해돋이 행사장에서 가수가 노래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태평가>와 <손에 손 잡고>를 믹스한 노래였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지당한 말이다. 구름과 안개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새해 첫해는 분명 떠올랐다. 해가 있다고 추정되는 지점부터 흐린 빛의 원이 점점 퍼지고 한강이 파스텔톤의 분홍으로 물들었다. 아름다웠다. “손에 손 잡고~” 새해 첫해가 얼굴을 내보여주길 기다리며 일점을 바라보는 그 순간만큼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하나였다. 일출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여기까지면 됐다. 충분히 스릴 있었고 충분히 흥겨웠고 충분히 뿌듯했다.





남편이 차에 시동을 걸고 후진을 했다. 눈밭을 처음 경험해 보는 우리 차는 무서운 엔진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아까 너무 급하게 차를 대는 바람에 앞바퀴가 고랑에 빠져있었다. 급한 대로 돌을 주워 마찰력을 만들기 위해 바퀴에 덧대보았지만 차는 꼼짝하지 않았다. 해돋이를 보러 와서는 동그란 해도 못 보고 이게 무슨 낭패람. 우리 차를 이 수렁으로 인도한 차는 간발의 차로 눈이 적은 흙길 쪽에 위치해 수월하게 빠져나갔다. 우리 차를 따라온 것이 분명한 오른쪽 SM5의 차주가 곧 도착했다. 부부인 듯싶었다. 평지에 제대로 주차해 놨기 때문에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부러워하고 있는데 그 차도 굉음만 낼뿐 움직이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커플과 한 팀이 되어 차를 밀었다. 차는 어느 지점까지 뒤로 밀렸으나 곧 진창에 빠졌다. 세단형 자동차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지옥의 눈밭. 그것도 모르고 제시간 안에 주차를 했다고 그렇게 좋아하다니. 네 명이서 차를 둘러싸고 한참 난리를 치고 있는데 SM5옆 소렌토의 차주가 등장했다. 장년의 부부였다. 소렌토는 눈밭을 빠져나와 옆 도로에 안착했고 소렌토 부부는 갈 길을 가는 대신 우리와 합세했다. 무리 중에서 운전과 인생 둘 다 가장 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보이는 소렌토 차주가 현장을 지휘했다. 근처 창고 주위에 버려진 녹슨 삽과 시래기 다발과 널빤지를 주워왔다. 바퀴 주위의 눈과 흙을 파내고 시래기를 뿌리고 널빤지를 깔았다. 꽤 오랜 시간을 차를 빼기 위해 애를 쓰며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서 점차 아는 사이가 됐다.




협동과 열정으로만  본다면 우리 손으로 차를 눈밭에서 구해야 마땅했지만 현실은 견인서비스 호출 엔딩이었다. 소렌토 커플이 먼저 차를 타고 떠났다. 헤어지며 서로를 향해 수고하셨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덕담을 나눴다. 장년의 부부는 아쉬움이 남는지 차를 타는 순간까지 계속 뒤를 돌아봤다. 시간이 흘러 우리 쪽 견인차가 도착했다. 여섯 명이 달라붙어 애쓴 노력이 우습게 고랑에 빠져있던 차가 단박에 움직였다. 하지만 그 시간이 허무하거나 아깝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모두 온화했고 차분했다. 덕분에 발은 꽁꽁 얼었고 공복으로 속이 쓰렸지만 나 또한 희망을 품고 평온하게 그 상황을 경험으로서 즐길 수 있었다. 눈밭이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서 만났어도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이들이었다. 아무리 궁리해도 어떤 이유로 우리가 새해첫날 이 눈밭에서 만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인연임은 분명했다.


서로를 돕는 온화한 사람들 덕분에 진창탈출의 현장은 흥겹고 북적거리는 새해 해돋이 현장과 다르지 않았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옳소! “손에 손 잡고~” 그렇지! 신나는 노래가 소리 없이 재생되었고 우리는 함께 일점을 바라봤다. 나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관심도 없던 해돋이를 보러 와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자조하던 SM5 커플에게 고생 많으셨다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진심의 인사를 남기고 차에 올랐다. 방금 헤어진 네 사람의 또렷한 얼굴을 마음에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가 구름 사이로 선명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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