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발이다!”
남편은 곧잘 사이즈 220밀리미터인 내 발을 보고 놀리는데 그럴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다. 책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묘사에 따르면 호빗의 발은 딱딱하고 질기며, 굵고 곱슬거리는 털로 뒤덮여있다. 굳이 책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영화를 스치듯 보더라도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그들의 발이 크고 거칠고 털투성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 발뒤꿈치에 생기는 각질 때문에 이따금 고운발 크림을 발라야 하지만 내 발은 아직 전반적으로 말랑하며 털도 없다. 한 번은 남편에게 이 사실을 진지하게 알렸다. 하지만 그는 콧방귀만 뀌었을 뿐 여전히 호빗발을 작은 발이라는 뜻으로 사용 중이다. 믿을 수 없다. 내가 호빗의 발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반지의 제왕>은커녕 <해리 포터>마저 읽거나 보지도 않은 남자와 함께 살고 있다니.(영화 해리포터 1편은 봤다고 주장하지만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신빙성이 없다.)
현실이 믿기지 않기는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몰랐다. 남편이 축구를 이렇게나 좋아하는지. 본인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조기축구만 안 할 뿐 축구광이다. 축구경기를 착실히 챙겨보고 늦은 밤이나 새벽에 열려 보지 못한 경기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찾아본다. 주말에 집에 있으면 온종일 축구 관련 영상을 틀어놓고 틈틈이 축구게임을 한다. 축구경기가 없는 날에는 한숨을 쉰다. 그런 사람이 2002년 월드컵 경기 이후로 축구를 보지 않는 여자와 같이 살다니. 심지어 그 여자는 축구는 물론 나아가 팀과 팀이 맞붙어 점수를 얻어 승부를 내는 스포츠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국적이 한국인지라 한일전만큼은 관심을 갖는 시늉을 하더니 얼마 전부터는 그마저도 부질없는 일로 치부하고, 오래전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지만 프리미어리그의 팀은 아스날과 첼시 밖에 모르던 사람이 아내라니.
우리는 각각 다른 세계를 품고 있기에 상대방의 열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드라구신 선수의 생일이었던 지난 2월 3일 토트넘 대 에버턴의 경기가 있었다. 축알못인 내가 드라구신 선수의 생일이 그날인지 어떻게 알았냐고? 해설자가 방송에서 언급하기도 이미 한참 전에 남편이 오늘이 드라구신 선수의 생일이라고 알려줬다. 정작 나는 드라구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는 토트넘이 2대 1로 앞서가자 한참을 신나 하다가 막판에 경기가 동점으로 비기자 한껏 짜증을 냈다. 멀리서 고양이와 놀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이 한마디를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독 나셨네.”
축구영상이 시끄러워 소리를 줄이라며 가끔 화를 내면서도 나와 다른 모양의 열정을 지켜보는 일은 즐겁다. 그는 해외여행을 갈 때면 나의 드문드문한 영어에 전적으로 의탁할 만큼 영어를 포함 어느 외국어에도 일절 관심이 없지만 외국축구선수들의 이름만큼은 유창하게 줄줄 말할 수 있다. 뭔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의 힘이란. 호빗의 발을 두고 일방적인 토론이 있던 날에도 그는 낯선 축구선수의 이름을 입에 버터라도 능숙하게 발음했고 그의 열정에 감화받은 나는 기념으로 그 선수의 이름을 다이어리에 적어놓았다.
왜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세상에 다시 없이 기뻐하고 팀이 지면 세상이 끝난 듯 우울해하는지 나는 그 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솔직히 말하면 하나의 스포츠를 일상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흥분되고 짜릿하며 신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삶일 것이다. 열광하고 실망했다가 다시 간절하게 응원하는 그 활기가 내 생활에 스며들고 나의 세계가 그 힘으로 조금 더 넓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근 들어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전과 달리 선수들의 이름을 주의 깊게 듣고, 자주 기침을 하며 속삭이듯 말하는 호주 출신 토트넘 감독의 이름을 남편에게 스무 번도 넘게 물어본 끝에 거의 외워가고 그와 함께 아르센 벵거와 베컴의 다큐멘터리도 봤다. 작년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FC서울과 광주FC의 경기도 직관했다.
남편이 축구를 큰 화면에서 보고 싶다는 이유로 빔프로젝트를 샀다. 거대한 스크린을 벽에 걸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둘이 함께 스크린을 걸고 빔프로젝트를 틀었다. 축구경기는 두 시간 후에 시작예정이라 반지의 제왕 명장면을 검색했다. 사우론의 도시 모르도르를 마주 하고 있는 곤도르를 지켜내기 위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장대한 전투씬에 남편은 반지의 제왕에 이런 장면도 있냐고 놀란 표정.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 영화이자 전쟁영화라는 걸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는 로한의 기마대가 나타나 사우론의 대군을 말밥굽으로 짓밟으며 길을 트는 장면을 입을 벌리고 바라봤다. 좋은 징조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 3편을 전부 빔프로젝트로 함께 관람할 수 있을 것 같은. 하나의 화면에 축구와 판타지가 같이 펼쳐지며 우리의 결혼생활이 두 사람의 세계를 모두 넓힐 것이다.
결혼생활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이 확실한 순간, 쐐기를 박을 한 방이 필요했다. 다이어리에 적어놨던 낯선 이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드디어 기억해 냈다.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나 그 선수 이름 외웠어. 그때 자기가 말했던 그 선수!”
“누구?”
“클루코프스키!”
호빗발이라는 말을 들을 때의 나처럼 남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클루셉스키.”
두 글자 차이로 아깝게 됐다. 어렵네, 어려워. 역시 축구는 손흥민이야, 황희찬도 멋있지. 베컴도 나쁘지 않아. 메시도 좋고. 하지만 누구보다 박지성, 안정환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