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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Apr 11. 2024

계절이 전부야

병원 예약시간에 늦는 바람에 오랜만에 택시를 탔다. 조금만 서둘렀다면 돈을 아낄 수 있었기에 택시에 오르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곧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봄의 따뜻하고도 상쾌한 바람, 파란 하늘, 그리고 길가에 줄지어 피어있는 목련에 정신이 팔렸다. 라디오에서 익숙하지만 최근에 들은 바 없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목련꽃 그늘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하얀 목련이 뭉게뭉게 피어난 길을 따라 달리며 봄의 노래를 들었다. 나는 계절의 한순간에 온전히 머물렀다. 더없는 만족과 평화. 사계절을 수없이 보내고서야, 내게 제대로 사는 일의 기본은 계절에 제대로 머무는 것이란 걸 알았다. 계절을 잊고 지내야 했던 시절에는 만족을 몰랐고 이따금 불행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계절에 충실한다고 해도 슬픔이 사라지거나 고통이 옅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계절에 딱 붙어있으면 삶의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품고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계절에 충실한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간다. 계절의 변화를 의식하고 그 변화의 찰나에 온전히 몸을 맡겨 풍경의 일부가 되려면 틈이 날 때마다 계절에 머무르기를 선택해야 한다. 계절은 때로 혹독하다. 혹한과 혹서, 끝이 없을 것 같은 장마나 미세먼지로 환기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면 나는 계절에 머물기를 포기하고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 다음 계절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지금의 계절에 집중하는 자세가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때보다 제대로 살기를 소망하며 올해 나는 봄이 오는 과정을 면밀히 살피기로 다짐했다. 영원히 얼어있을 것만 같던 흙에서 풀들이 하나둘씩 돋아나더니 영춘화가 피고, 산수유나무에 노란빛이 돌더니 귀룽나무에 새싹이 돋아나고, 버드나무 가지에 연둣빛 물이 올라오고 매화가 폈다. 목련이 꽃잎을 삐죽삐죽 내밀고 개나리가 폈다. ‘이제 곧’, ‘이른’, ‘이만큼 왔다가 저만큼 물러나는’, ‘드디어’. 날씨의 변화와 계절의 진전에 따라 봄은 여러 수식어를 가졌다. 봄은, 하얗고 노란 냉이꽃들이, 서로를 끌어안을 듯 나란히 피어난 민들레와 제비꽃이, 작아서 더 귀여운 꽃다지가, 파란색 봄까치꽃이 한가득 펼쳐진 풀밭 앞에서 탄성을 지른 날을 지나 올해 처음 나비를 본 날과 벚꽃이 피기 시작한 날을 거쳐 이제, 누가 뭐래도, 완연한, 진짜 봄이 되었다.





아파트 정문 양쪽에 근사한 벚나무 두 그루가 있다. 분명 그저께만 해도 꽃이 막 피기 시작했는데 단 하루 딴청을 부리는 사이에 꽃이 만개했다. “아니, 언제 이렇게 꽃이 핀거야!” 입을 벌리고 나무를 바라보는데 지나가는 한 여자가 동행에게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꽃이 하나도 안 폈었다고!” 호수공원의 커다란 벚나무 앞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어제는 꽃이 하나도 안 폈었는데 오늘 다 펴버렸네.” 중년의 남자 둘이 커다란 벚나무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봄은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 봄의 매 순간에 머무르기로 다짐했건만 잠시 눈을 비비는 짧은 사이에도 봄은 깊어진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놀란다. 그리고 매일 기쁘다. 그러다가 생각한다. 계절이 전부라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계절에 머물고 계절을 느끼고 계절을 사는 것. 새처럼 곤충처럼, 풀처럼 나무처럼 인간도 그렇게 사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삶이 단순해진다. 살아있다는 기쁨이 강렬해진다. 봄에는 봄의 존재로 살아야 한다.  




며칠 전 치과를 다녀왔다. 13년간 두 개의 치아와 그 사이의 비어있는 공간을 감싸고 있던 보철을 절개해 비틀어 빼냈다. 치아 표면을 다듬고 충치를 제거했다. 치료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드릴처럼 느껴지는 기구가 충분히 날카롭지 않았는지 보철을 자르다 말고 여러 번 교체했다.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아 두 번이나 추가 마취를 진행했다. 결국 잠자기를 거부하는 신경 때문에 양손을 꽉 맞잡고 어느 정도 희미해졌지만 묘하게 또렷한 고통을 참아야 했다. 치료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는 다리가 휘청거렸고 두 손이 차가웠다. 홀로 흐느끼며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하는데 아! 커다란 창문 너머로 빛나는 눈부신 벚꽃. 마취 때문에 일그러지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봄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사사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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