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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Apr 04. 2024

사과상자와 고양이와 목련

소중히 품었던 사과를 내어주고 텅 비어버린 사과상자가 어느 아파트 베란다에서 재활용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그 집에 살고 있는 부부에게 딸의 전화가 걸려왔다. 딸이 키우는 나이 든 고양이가 죽어가는데 반려동물 장례식장으로 고양이를 넣어 데려갈 상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부부는 전화를 받고 바로 사과상자를 떠올렸다. 다른 상자도 아닌 사과상자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딸이 키우는 다섯 마리 고양이 중에 처음으로 한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 부부는 딸과 죽은 고양이를 태워 반려동물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고양이의 죽음을 처음 겪어보는 딸은 고양이가 죽으면 운구용 상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황망한 가운데 눈물을 쏟으며 방을 뒤졌고 종이조각을 찾아내 테이프로 엮어 조잡한 상자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고양이를 눕혀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며 딸은 혹시라도 상자가 터져 생명의 빛을 잃은 고양이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노심초사했다. 충분히 튼튼한 상자가 필요했다. 나이 든 고양이는 먼저 죽은 고양이보다 체구도 커서 사과상자 정도의 크기가 적당할 듯싶었다.




아빠에게 사과상자를 건네받은 딸은 흡족하면서도 좁은 집에 상자를 보관할 마땅할 공간이 없음에 당황했다. 고양이는 곧 죽을 예정이었으므로 순하고 하얀 고양이의 운구차가 될 상자는 임시로 차 트렁크 안으로 들어갔다. 상자는 주차된 차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고 주행 중에만 가끔씩 흔들거렸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또 몇 달이 되면서 상자는 과속방지턱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한 운전자 때문에 트렁크 안에서 펄쩍 뛰기도, 급브레이크에 자리를 이동하기도 했다. 본넷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하염없이 듣기도 땡볕아래 불가마에서 이글이글 익기도 했다.


사계절이 두 번이나 흐르는 사이 딸은 이따금 차 트렁크를 열다가 사과상자를 발견하고는 슬프면서도 든든했다. 어느 날은 완전히 잊고 있다가 상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놀라 웃기도 했다. 그동안 좋아하는 농담도 생겼다. “사람도 수의를 미리 준비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듯이 고양이도 죽어서 들어갈 상자를 미리 구해놓으면 오래 사나 봐.” 동물병원에서 며칠 내로 죽을 수 있으며 길어봤자 몇 달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일 년이 흐른 시점에서 사과상자를 받아왔으니 고양이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3년을 넘게 생존중이다.





딸의 고양이는 여러 번 죽어가다 여러 번 다시 살아났다. 고양이가 죽음을 목전에 둔 첫해의 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딸은 터지듯 피어나는 목련을 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통화 중이었고 평소 같으면 엄마가 바쁜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 것을 다른 것도 아니고 목련인데, 목련이 피었다는 그 말이 꼭 하고 싶어서 두 번 더 부재중 전화를 남겼다. 세 통이나 전화가 와있는 걸 본 엄마는 가슴이 덜컹했고 딸에게 전화를 걸어 고양이가 죽었냐고 물었다. 고양이는 살아있고 목련이 피었다는 대답을 하고는 딸은 엄마와 함께 웃었다. 봄이 세 번 오는 동안 딸은 몇 번이나 이번에는 고양이가 진짜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는 이제 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딸은 양치기 소년이 된 것 같아 억울했다.




올해도 목련은 하얀 꽃을 뭉게뭉게 피웠고 고양이는 조금 작아졌지만 여전히 보송보송한 하얀 몸을 소파에 기대고 느긋하게 창너머의 봄을 바라본다. 하지만 차 트렁크에 줄곧 사과상자가 실려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지금은 잡동사니 수납함의 신세지만 상자의 진짜 목적은 죽은 고양이를 품는 것이며 그 일이 실현되기 전에는 트렁크 안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상자가 얼마나 더 트렁크에 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최근에 딸은 잠시 잊고 있던 사과상자를 떠올렸다. 지난겨울 폐에 물이 차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긴 고양이에게 머지않아 상자가 필요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핀 것 같은데 어느새 뚝뚝 무겁게 꽃잎을 떨구는 목련을 앞에 두고 딸은 생각했다. 언젠가 비어버린 트렁크를 보며 울고 말겠지. 하지만 오늘은 늙은 고양이의 몸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함께 봄에 머무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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