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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집 Oct 18. 2021

구세주 같은 공동육아구역

첫 만남

나는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처음 유치원에 갔다. 그때는 유치원을 안 다니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많았고,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하면 대번에 '아니 엄마는 뭐하고?' 생각하거나(직접 묻기도 했다), '집에 돈이 많나?' 다시 한번 얼굴을 쳐다보게 되는 그런 시절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엄마가 되고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엄마는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지금과 시대가 많이 달랐다. 일단 형제자매가 많았다. 큰 아이가 작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그럭저럭 놀았고, 그럭저럭 자랐다. 우리 집도 네 자매였다. 넷만 있어도 애지간한 놀이는 다 할 수 있었고 심심할 틈이 많지 않았다. 

오며 가며 손도 많이 탔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 집들도 많았고, 이모, 고모, 삼촌, 숙모가 같이 살기도 했다. 한 지붕 세 가족 같은 느슨한 테두리의 가족도 많고, 골목길 대문과 대문 사이의 경계는 흐릿했다. 엄마가 특별한 외출을 한 날이면 앞 집 아줌마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들기 직전까지 놀다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한 번씩 돌아가며 쓰다듬을 받고 해주는 밥을 먹다 보면 아이들은 어느새 쑥쑥 자라 있었다. 


요즘 육아는 '독박 육아'다. 오롯이 아이를 먹이고, 닦이고, 재우고, 노는 일들이 엄마의 몫이 되었다. 독박은 정말 살벌한 거다. 화투에서 쓰는 이 전문 용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다.



독박: 혼자서 모두 뒤집어쓰거나 감당할 때 쓰는 표현


이 무시무시한 표현은 이제 화투판보다 육아판에서 훨씬 빈번하게 사용된다. 풋풋한 삼십 대의 초입, 나는 이 독박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화장실도 마음 편히 갈 수 없는 나날들을 보내며 수험생이나 직장생활에서 느끼던 것과는 또 다른 원초적 중압감을 느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아이가 넘어지거나 물건을 떨어뜨려 울 때마다 죄책감에 어쩔 줄 몰랐다. 아이를 돌보며 씻기고 먹이고 치우는 일들을 혼자 다 해낸다는 건 아무리 똑똑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마'라는 말이 '불가능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읽혔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갓난아기를 내 몸의 일부처럼 찰싹 붙이고 다니며 키워내니, 이제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생애 최초의 공식적 '분리'의 단계에서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부지런히 인터넷을 검색했다. 지역맘 카페와 여러 커뮤니티를 부지런히 찾아보니 '00 어린이집 선생님들 참 좋으세요~' 하는 글들이 여럿 보였다. 그런데 뭐가 좋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좋다'라는 말이 너무 함축적으로 느껴져 잘 와닿지 않았고, 낯선 곳, 낯선 사람에게 내 아이를 맡길 수 있을까? 의구심과 두려움만 커졌다. 그러다 한 문장이 빛을 내며 내 눈에 들어왔다. 



남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부모가 모여 함께 키우는 공동육아



부모들이 함께 모여 키운다니 이건 그래도 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더불어 '자연과 함께하는 생태교육', '아이들 각자의 고유한 개성', '자유롭고 평등하게', '마을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는' 같은 설명들이 마음을 붙들었다. 검색창에 다시 '공동육아'를 넣고 하루 종일 필기를 하며 공부했다. 그때까지 세상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을 만큼 '공동육아'는 어린이집, 유치원들의 세계 속에서 아주 미미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 '공동육아'의 가치관을 선택한 부모들은 다소 먼 지역까지 아이들을 차로 데려다주거나(공동육아는 노랑이 버스를 운행하지 않는다), 공동육아 어린이집 근처로 이사를 가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한마디로 마음만 먹는다고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었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우리 동네에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있다는 걸 알았고, 당장에 주말이 지나고 상담을 가기고 약속을 잡았다. 기대하며 주말을 보내고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땐, 앞 서 상담을 한 집 아이가 들어오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동육아는 대부분 규모가 작고 3, 4세의 어린아이부터 7세까지다양한 나이 폭의 아이들이 다니기 때문에 연령별 공석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 결국 그 뒤로도 육 개월 가까이 기약 없이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우리 동네에 새로운 공동육아가 문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검색에도 뜨지 않는 이 새로운 공동육아를 찾아 우리 세 가족은 길을 나섰다.


푹푹 찌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이던 한 낮이었다. 높은 아파트들 사이로 샛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길 끝에 샘물처럼 맑은 아이들 소리가 시작되는 곳이 있었다. '여기구나!' 활짝 열어젖힌 문, 이리저리 뛰고 떠드는 아이들을 방해하는 역할이 되고 싶지 않아 주춤대고 서 있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 저 어린이집 구경 왔는데요."


"들어오세요."


방충망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널찍한 공간에 남자아이 하나가 엘사 드레스를 입고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드러눕거나 편한 대로 돌아다니며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묶인 보자기, 헝겊 인형, 종이 벽돌, 나무 블록 등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손님맞이에 준비가 안 된 자연스러움, 한마디로 난. 장. 판이었다. 허울 없이 선생님에게 달려가는 아이들, 하나도 통일되지 않은 아이들의 넘치는 개성, 그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은 연출로는 될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였다. 다른 어린이집에서 보았던 정돈된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도 길들여지지 않았다


이게 첫 느낌이었다. 이 동네에 이렇게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사람들을 최근에 본 적이 있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훅하고 자기소개가 들어왔다. 


"전 고래입니다."


맘 카페에서 읽은 글이 빠르게 떠올랐다. '공동육아에서는 교사와 부모들이 모두 별명을 지어 부르고....'


“안녕하세요, 전 구름이에요” 


흑백의 대조처럼 유독 하얀 얼굴의 두 번째 교사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이곳은 정체가 뭘까? 동물의 숲? 아니면 사이비 단체? 뭔지 모르겠지만 묘하게 현실감 없는 공간의 색만큼은 분명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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