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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ug 12. 2021

당신은 지금 살고 있군요


잠에서 깰 때마다 생각했다. 왜 오늘은 세상이 망하지 않았나.


눈을 뜨는 행동은 같은데 따라오는 생각은 작년과 정반대였다. 원래의 나였다면 명랑하지만 소란스러운 알람을 끄며 '오늘은 뭘 할까'라거나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라 궁리했다면, 이제는 자기 공격적이다 못해 세상 파괴적인 마음을 품었다. 피아노도, 닌텐도도, 친구와의 통화도 모두 재미없었다. 바쁘게 사는 사람을 보면 나아질까. 두 명이 눕기 협소한 원룸에 살아도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나가는 친구를 보면 자연스레 열의라는 감정이 자라날 줄 알아 속세로 나와 봤지만 아니었다. 그들이 바쁘게 지낼수록 속은 천천히 타들어갔다. 이렇게 쉬어도 괜찮나.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나. 하려는 의지와 실행하는 노력이 합쳐지면 부정의 굴도 결국 빠져나가는 나였기에 암흑 같은 죄책감의 시기도 금세 털어버릴 줄만 알았다.


나는 일 인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어느 오후, 늦게 일어난 내게 속마음이라는 환청이 들렸다. 직장을 다니지 않거니와 구직도 하지 않는 내가 볼품없어 보였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문을 걸어 잠근 동생과 친해지고자 구미가 당길 여러 영화를 준비했다. 하나뿐인 동생과 친해지지 않으면, 서울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는 친구와 연락이 끊기면, 돈을 벌지 않으면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 같았다. 최근 들어 글도 쓰지 않고 영화도 책도 들춰보지 않으니 "오늘 무얼 했나요?"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매일 누워 지내니 번아웃은 아닌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은 번아웃과 같은 상태였다.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하루가 지나갔다.


이러다가는 자기 파괴적인 사고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겠구나. 밧줄을 잡는 마음으로 음악 치료를 신청했다. 한 시간에 육만 원이 든다지만 의욕을 상실한 내게 무언가 조그마한 열정을 선사한다면 그 무엇도 해볼 용의가 있었다. 상담을 신청하거나 약을 받아올 때마다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무척 건강한 사람이라고 칭찬해주었다. 나아지려는 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일에도 주저한다고. 듣는 앞에서는 군말 없이 고개만 꾸벅 숙였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상담을 받든 받지 않든, 약을 먹든 먹지 않든 우울을 겪는 모두 건강한 사람이다. 속이 답답하고 숨을 채 쉬지 못하고 나를 탓하는 아픈 생각이 자꾸 들어도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사람. 자신을 해하려는 욕구를 참으며 때때로 웃는 사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니 "의지를 지녀라"라거나 "배가 불러서 그렇다. 정말 배고프면 우울조차 들지 않는다."라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듣는 사람 전부 대단하다.




선생님이 물었다. "주로 뭘 하며 지내나요?"

"잠을 자요. 별 거 없죠." 내가 답했다.




내내 잠만 잔다고 하면 대개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야 한다거나 몸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마음의 컨디션도 관리할 수 있다는 답을 들었지만, 오늘의 선생님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니에요. 살고 있는 거죠." 내가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살고 있는 상태가 기본값이잖아요." 삐뚤어진 말투에 선생님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요아 씨는 지금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는 내 마음이 '다 됐다' 하기 전까지는 사는 게 하는 일이 아닐까요."


값을 구하시오. 답을 맞히시오. 엄마는 답을 많이 맞히면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일할 수 있댔다. 세상에 조언이 넘쳐흐르는 건 뚜렷한 답이 없어서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좀처럼 사람도 못 만나고 밝은 미래는 보이지 않고 마음은 자꾸 후퇴하는 시기라 꼭 답을 구하고 싶었다. 누군가 나타나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거라고 짚어주길 바랐다. 공무원이 되라거나 대기업에 들어가라는 직업의 이유 말고, 어차피 삶은 끝나기 마련이니 버티라는 얘기 말고 의미를 정해주는 사람.


좋아하는 걸 따라가면 살고 싶은 이유를 찾는다지만 향초부터 립밤, 샐러드, 스콘, 패러글라이딩까지 예전의 내가 좋아하는 걸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해도 예전만큼의 짜릿함이 들지 않았다. 나를 꼭 쥐고 구기면 바스락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거야. 그나마 맺혀 있던 물기가 증발돼 껍데기만 남아 간신히 나풀대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매사 싫다는 말을 입 안에 담고 있어 그나마의 재미를 주려는 상황도 피해버린 걸 수 있겠지만.


목표를 잡고 그걸 성취하며 이십 년 넘게 산 사람이 목적 없이 쉬면 답답하다. 다른 이와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라지만, 사회적 동물에게 타인을 완벽히 무시하고 살라는 얘기는 쉽게 실행하기 어려운 조건이라 믿는다. 피곤하거나 어떤 일도 하지 못할 때, 평소 좋아하던 것들이 더는 내 눈길을 끌지 않을 때 우리는 '잠시' 쉬자고 결심하지만, 그 '잠시'라는 시간은 정해지지 않아서 한 달, 두 달이 흐르면 이제 그만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규정하지 않은 자체 방학이라는 시간에 머리를 굴리느라 몸은 쉬어도 정신은 스스로를 미워한다.


그러면 모두가 목표를 '사는 것'으로 바꾸면 어떨까. 서로를 질투하고 자신을 사회의 잣대에 들이밀지 않고서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움직이는 방안. 유명한 대학이나 기업 말고, 수도권의 높은 아파트 말고, 차트 안에 속하려 전전긍긍 말고 그저 사는 것.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는 건 참 어렵다. 굶어 죽지 않으려 때에 맞춰 적당한 영양도 입에 넣어주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고 가끔 사람들과 얘기하기 위해 뉴스를 틈틈이 보기도 한다. 치아가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양치질도 하고 벌레가 꼬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미룬 설거지도 해야 한다. 와중에 차에 치이지 않게 하기 위해 빨간 불에서는 잠시 멈추고 초록 불로 바뀌면 길을 건넌다. 세상의 규칙을 습득하고 몸이 망가지지 않게 하는 모든 게 기본값으로 뭉뚱그려져 그 밖의 명예와 돈을 바라보는 것 같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가 내게 무얼 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살고 있어."라고 답해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훗날 볼 면접장에서는 "휴식기에 뭘 했어요?"라는 질문을 받겠지만, 그때 세 번 정도는 "세상을 접고 싶은 마음을 잠재우고 살기 위해 애썼습니다."라고 답해야겠다. 세상에서 제일 오글거리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리고 여기까지 찬찬히 글을 읽어내려준 당신에게 오늘도 함께 살아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지.



Epilogue.


"왜 살아야 해요?"

"그건……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리 살아 있잖아요."


멋들어진 위로보다 훨씬 위안되는 말. 숨이 붙어 있으니 계속 버티라는 뜻이 아닌, 허울뿐인 삶이라 느껴져도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다는 칭찬. 당신은 살고 있군요. 당신은 무얼 하지 않아도 살고 있어요. 당신은 그 사실 하나로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셔도 제게는 충분하다고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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