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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Sep 19. 2019

정답지에 갇힌 삶

우리는 이미 답을 만들어뒀다

지금 초등학생과 나의 초등학생 시기는 별반 다를 게 없다. 유튜브가 일상화되고 있고 아이들의 꿈이 크리에이터로 변해간다고 하더라도 어른이 만드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건 동일하다. 아이들은 변화되는 흐름에 맞춰 규격화된 삶을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만 그 시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가로막는 건 우리 어른들이다.


초등학생이라면 여전히 공부하는 걸 싫어한다. 매일 앉아 있는 것도 모자라서 강요를 당하는 일인지라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단다. 회사 일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물질적인 보상을 받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손에 쥐어지는 게 없다. 따르는 보상이라고 해봤자 좋은 성적이라는 허울. 아이들에겐 성적보다 이제 뭘 하고 싶은지 이해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 됐다.


정답지에 맞춰 살고 있는 사람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는 임용고시에 불합격하고 귀향한 해원(김태리)이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불합격의 쓰라림에 자존심이 상하고 더 이상 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는 대신, 그냥 잘 먹기로 결심한 듯하다. 영화를 보며 '쟤 지금 저럴 때야?'라는 말보다 '지금까지 내가 달려온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이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됐다.


빠름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우리 청춘은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는 새로운 삶의 지침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기성세대와 우리는 분명 성향이 다르다. 한 직장에 안전 고용이 되어 정년퇴직을 맞이하는 그들에겐 안전한 삶을 기대할 수 있는 암묵적인 사회의 틀이 존재했다. 90년대생인 20대와 30대는 습관처럼 이직을 해야 하고, 평생 직장이 없어 제2의 급여로 돈 벌 궁리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애잔한 청춘에게 주는 선물 같은 영화였다. 기승전결 없는 무자극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150만 관중을 이끌어내며 흥행에 성공했다. 청춘 그리고 기성세대 모두에게 인생에 정답지는 없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위로해준 것도, 한 개별적 인간들에게 자신의 선택이 정답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해줬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원래 우리의 개별성은 철저히 무시되고, 사회는 정상적인 삶이라 생각하는 보통의 범주로 편입하는 것의 중요성을 논한다. 정상이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 문화적으로 살아가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준, 곧 우리가 요구하는 획일화된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배제될 가능성이 존재함을 뜻한다. '정상'의 사람이 만든 제도와 사고방식은 우리의 일상 공간을 지배한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우리가 '죽여도 되는 자'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어도 되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곧 인간은 현실 권력 안에서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으며 속박당한 존재임을 말한다.


정상이 과연 올바름의 척도일까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 속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한다. 그때 우리는 감정을 분출한다.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표현의 방법은 비슷하다. 억울한 상황에서는 분노를 표출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웃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아몬드>의 윤재는 그렇게 보자면 비정상의 범주에 속한 아이다. 선천적으로 작은 편도체 탓에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한다. 아이들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냐며 그의 모습을 두려워했지만 시간이 지나가며 <아몬드> 주제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실제론 우리가 만들어 놓은 허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정상은 삶을 편하게 살아가는 첫 번째 조건이다. 정상적인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특별한 질문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상이 과연 올바름의 척도일까. 올바름은 '말이나 생각, 행동 따위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르다'는 뜻을 가졌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개별성은 무시한 채 사회적 틀의 우리가 '맞다'라고 칭한다.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다. 물론 제도 망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지켜야 할 일종의 규범이 있다. 하지만 정상의 범주 안으로 나를 가둘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면 내 속에 잠재된 미소 짓게 만드는 하루가 홀연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정상이라는 범주 안에 나를 대상화시키기보다 본연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 행복의 시작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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