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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Oct 08. 2019

파스타가 맛있어서 한 퇴사

파스타 탓으로 돌려야 좀 낫겠어?

"나, 퇴사해도 돼?


결혼식을 2개월 앞둔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남편이 될 그에게 퇴사를 말했다. 한 달 동안 새벽 출근과 저녁에는 결혼 준비를 하느라 피로도가 쌓여있던 그에게 퇴사를 말하기엔 나만 생각한 이기적인 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날, 파스타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 행복했지만 마냥 행복할 수 없었다.


건너편에서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예쁘게 플레이팅 된 파스타에 눈길을 빼앗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숟가락에 아주 조금 소스를 덜어 맛을 본다. 토마토의 상큼함과 크림의 부드러움이 공존하며 살짝 혀를 감싼다. 한두 가닥의 면이 입 안에 들어왔을 뿐인데 이미 파스타 하나를 다 먹은 기분이었다.


이번 퇴사는 분명 파스타 때문이야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이 퇴사를 고민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상사와 대표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회사에서도 사람 때문에 울고 웃고 그렇게 희로애락을 경험한다. 모든 삶에서 사람과의 관계는 빼놓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직장생활에서는 사람 때문에 회사를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똑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대가 어느 대목에서 상처를 받을지 잘 모른다. 그래서 예의 바른 사람들은 더욱 조심성 있게 행동하는 편이다. 보편적인 상황과는 반대로 나의 조직에 있는 그들에겐 조심성이 부족했다. 그들의 목소리 데시벨과 가감 없는 언어 선택은 자꾸 나를 퇴사라는 시험에 들게 만들었다. 


꾹 참고 비위 좀 맞춰드리면 되잖아. 마음을 사로잡는 데 까진 가능하다만 그렇게 해결하다간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나를 맞추다 보면 나의 고유 색깔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내 특색이 사라질 수 있다. 맞추기 위해선 우선 멘탈이 강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이미 글러먹은 유리 멘탈이다.


파스타로 다시 돌아와, 크림과 토마토를 동시에 섞어 놓은 로제 파스타 안에는 해물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해물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맛과 상큼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느끼자 온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반죽도 쫄깃했고 시간이 지나도 면이 불질 않았다.


파스타의 작은 세상도 균형이 있었다. 그리고 그릇 안 재료들은 일정 부분 자신의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었다. 각 재료들의 향이 거부감 없이 제각각 순서대로 느껴졌고,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은 맛보러 온 손님들의 혀를 즐겁게 해주는 하나의 목표가 잘 달성하고 있었다. '내가 더 맛있어, 내가 더 잘해, 모든 건 다 나 덕분이다'라는 그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았다.


파스타를 먹으며 진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좋은 재료들만 모아두면 뭘 하나. 음식에 맞는 재료가 있어야지. 그리고 재료가 어우러질 줄 알아야 진짜 하나의 요리가 탄생하는 거였다. 모두 각자 최고의 사람들이라도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선 모두가 한 발짝씩 물러서서 양보하는 법을 알았어야 했다.


모든 건 다 내 덕이라고 생각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우리는 갈 길을 잃었다. 각자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걸 무시하고 그냥 재료를 마구 때려 넣었다. 우리의 일은 간이 너무 짜져서 못 먹을 무언가로 변했다. 


의욕을 잃어버린 난 쓸모 없는 재료로 변했다. 냉장고 바깥에서 실온으로 내팽개쳐 재료의 기능을 소진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자꾸 까먹고 어떤 요리를 해야 하는지 어렵기만 했다. 내 역할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와인잔으로 건배하며 우리는, 지금과 미래를 함께 고민한다.


"그래. 정말 했으면 좋겠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자금 때문에 넉넉지 않은 상황에도 그는 괜찮단다. 내가 돈 벌 테니 이제 좀 쉬라고 말한다. 회사 생활을 처음 시작한 그는 조직 생활을 통해 '나를 잃어간다는' 두려움을 철저히 느끼고 있었다. 특히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그는 내 빈 잔에 와인을 채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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