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지대를 그리다
누구에게나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 있다. 사람 사이에서 상처를 입거나, 예기치 않은 일로 불안이 밀려올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어디쯤 안전하게 머물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내면의 안전지대'라는 개념을 사랑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마음속에 만들어진 안전한 장소. 이곳은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그려낸 풍경이다. 하지만 그 느낌만은 너무나도 생생하다. 어쩌면 실제보다 더 따뜻하고, 더 나를 위로해주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우리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아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고. 마음속으로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을 떠올리면, 실제 햇살을 쬘 때와 비슷한 신경 반응이 일어난다고 한다. 시각 피질이 반응하고, 심장이 천천히 뛰고,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불안 호르몬이 줄어든다.
즉, 내면의 안전지대는 단지 상상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진짜 효과를 가진 도구가 된다. 명상이나 심리치료에서 이 기법이 자주 활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상처가 많거나 감정을 쉽게 다루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이 마음속 피난처가 치유의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내게도 그런 장면이 있다. 아주 힘든 시기에 떠오른 이미지였다. 초록빛 언덕 아래,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그 곁엔 작고 하얀 말티즈들이 뛰어다닌다. 흐드러진 벚꽃과 라일락이 어우러진 나무 아래,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고, 그 옆엔 소녀가 내 손을 꼭 잡고 서 있다. 말없이 바라만 봐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 그림은 어느 날 문득 내 마음속에서 떠올랐고, 이후 나는 여러 번 그 풍경을 다시 찾았다. 힘들 때마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그곳에 가면 다시 나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장면은 이제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 안전지대는 특별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다. 중요한 건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것.
예를 들어,
어떤 장소에 있는가? 바다, 숲, 방, 하늘, 아니면 상상 속 세계일 수도 있다.
그곳엔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새소리, 바람 소리, 잔잔한 음악, 혹은 고요함.
어떤 촉감이 있는가? 따뜻한 담요, 부드러운 풀밭, 햇살의 감촉.
누구와 함께 있는가? 동물, 나를 도와주는 존재, 아니면 오롯이 혼자일 수도 있다.
이렇게 내면의 감각을 하나하나 그려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공간이 실제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곳은 나만의 안식처가 된다.
내면의 안전지대는 외부 세계를 바꾸는 힘은 없다. 하지만 내 마음의 온도는 바꿀 수 있다. 위협적인 기억과 감정을 안전한 배경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고, 무너졌던 감정의 균형을 다시 맞추게 해준다.
이 공간을 자주 떠올릴수록, 우리는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그림 속의 나'처럼 숨을 고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삶은 늘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흐르지만, 마음속 안전지대는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며 우리를 기다린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곳이 있기를 바란다. 외롭고 아플 때마다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 내면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쉼터. 언젠가 당신도 그 풍경을 그리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기를.
그림 속 그곳에서, 오늘도 나는 다시 나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