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나를 돌보고 있는가
얼마 전,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내 친한 친구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보통 이런 꿈을 꾼다면 배신감, 분노, 혹은 질투심이 뒤엉킬 텐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잘 걸렸다. 늬들끼리 살아라. 나는 이제 떠날 거야"라는 후련한 말이 꿈속 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너무나 명료하고도 차가운 결단이었다. 그 감정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마치 오래된 짐을 내려놓는 해방감에 가까웠다.
꿈을 곱씹으며 문득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나는 어떻게 나를 돌보고 있는가?"
내게 그 친구는 현실에서도 무조건적인 지지자다.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믿어주고, 언제나 나의 편에 서주는 존재다. 분석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친구는 나의 아니마, 즉 내면의 여성적 자아가 투영된 상징일지도 모른다. 나를 감싸고 보호하며,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자아의 모습. 그런 친구가 내 남편과 바람을 피운다는 설정은, 어쩌면 내 안에서 무언가가 오염되었다는 무의식의 항변일 수 있다.
한편, 꿈에 등장한 배우자는 현실에서도 종종 나를 옥죄는 존재다. 논리와 규율, 비판과 기대. 그의 시선은 내 내면의 자유로운 자아를 가두는 억압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적인 아니무스의 작용으로 본다. 여성 안의 남성적 에너지가 왜곡될 때, 그것은 통제, 판단, 혹은 자기 억압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꿈은 결국 내 안의 상징들이 서로 부딪히는 장면이었다. 아니마는 나의 순수함과 자율성을 상징했고, 배우자는 현실의 구조와 억압을 대표했다. 그 둘이 연합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참고 견디지 않았다. 질투도 아닌, 원망도 아닌, 명확한 결단과 분리를 선택했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떠났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나를 돌보고 있었다. 꿈이라는 무의식의 장에서조차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오염된 아니마를 되찾고, 억압적인 아니무스를 떠나는 결단. 그것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난 조용한 혁명이었다.
현실에서 나는 종종 내 감정을 미루고, 타인의 기대에 맞추며 살아왔다.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기보다, 상황에 맞는 행동을 택하곤 했다. 하지만 내 무의식은 그게 아니라고,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건 무너짐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우리는 종종 말한다. "나를 돌보자"고. 하지만 진짜 돌봄은 예쁘고 따뜻한 말들로만 되지 않는다. 때론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고, 오래된 구조와 작별해야 가능해진다. 나에게 이 꿈은, 그 작별의 예고편이었다.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었고, 나는 이제 그 흐름을 따라 현실에서도 나를 새롭게 마주해야 한다.
나는 이제 묻지 않는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대신 이렇게 묻는다.
"나는 지금, 나를 어떻게 지켜내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도, 나를 위해 한 발짝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