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와 같이 가기로...
내가 나를 괴롭혔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그림자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가?”였다.
내 삶에서 겪은 고통들이 단순한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그림자가 작동한 결과였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는 그 그림자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궁리하게 됐다.
알고 있던 나의 일면들이라 그나마 받아들이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단 무의식에서 비롯된 그림자는 그와 달랐다.
그것은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무력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 그것은 절대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심지어 그 집단에 저항하거나 싸워서 없애버리고 싶다는 마음도 일었다.
그러던 중, 문득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나는 집단 무의식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
‘선’과 ‘악’, ‘건강한 자’와 ‘병든 자’, ‘나’와 ‘그들’.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판단이 나를 지키는 듯했지만,
그건 또 다른 방식의 분리와 배제였다.
예를 들어, OOO 교수에 대한 내 감정을 들여다보자.
곧 퇴임을 앞두고 있는 그 사람은, 내가 대학원 시절 가장 크게 수모를 느꼈던 인물이다.
그 불쾌함과 굴욕감은 나만의 기억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그림자를 주변 학생들에게 투사했다.
그러고는 ‘교만하다’, ‘무지하다’, ‘감정적이다’라는 레이블을 붙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적을 F로 주었고, 항의하면 항의했다고, 피하면 피했다고 비난했다.
나는 그 교수에게서 F학점을 두 번이나 받았고, 석사 졸업은 간신히 턱걸이로 이뤄졌다.
그 흔적은 내 성적표에 치욕으로 남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간을 견뎌낸 전쟁의 훈장 같기도 하다.
그만큼 나를 단련시킨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퇴임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게 F라는 흔적을 남긴 그녀에게도, 인생에 그런 흔적 하나쯤은 남아야 하는 게 아닐까?’
정당한 분노라고 믿었던 그 감정 안에 보복하고 싶은 마음, 저주의 감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내가 그녀를 벌할 수 없다면, 세상이 대신 벌해주길 바라는 마음.
내 수호령이 있다면, 그녀의 길을 조금 막아주길 바라는 마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여자는 아픈 사람이다.
내가 늘 타인의 고통에 관대하면서도
왜 그녀에겐 그 관용이 없었을까?
나는 그녀를 ‘정상인’ 또는 ‘전문가’로 기대했기에 그 기대가 부서졌을 때 분노했고, 그 분노로부터 저주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그 구조는 낯설지 않았다.
남편과의 관계도 같은 구조였다.
그 역시 한편으로는 상처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내 삶을 구원해줄 존재로 기대했고, 그 기대가 무너지면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교수도, 남편도, 모두 내 그림자가 투사된 존재들이었다.
그 순간부터 달라졌다.
‘그들과 어떻게 잘 지낼까’라는 고민보다 ‘이 관계를 내 마음에서 어떻게 정리할까’를 더 고민하게 되었다.
억지로 다가가야 할 이유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도, 그들이 변하길 기대해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그저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인식을 알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내 눈에는 이제 ‘마음이 아픈 사람’으로 보인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내리는 판단과 행동을 건강한 이성의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면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이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도 내 마음이 평온해지는 방식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는, 언제든지 나를 또 다른 가해자로 만들 수 있다.
그 구조에 머무르는 한, 나는 보복을 꿈꾸는 피해자이자 스스로 만든 카르마를 반복하는 사람이 된다.
이제 나는 그 구조를 바꿔본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상처 입은 이’와 ‘그것을 알아차린 이’로서.
그렇게 보면, 나는 내 상처를 덜어낼 수 있고, 그들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나 자신을 덜 괴롭힐 수 있다.
이걸 알아차리기까지
왜 그렇게 아팠는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웠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이 구조는 단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돈, 부부, 직장, 집단 관계까지
삶 전반에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림자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림자를 내 옆에 두고, 이해하며, 같이 가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조금씩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