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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모음의 마지막 글...

또다른 조각모음을 위해

by 석은별

며칠 전 새벽, 깊은 무력감 속에서 잠이 들었다. “이렇게 두렵고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너무 벅차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곳은 눈부신 금은보화로 가득한 세계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돈은 그저 필요할 때 쓰는 ‘도구’였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그것을 쥐고 들어가 음료를 사 마셨다. 그 누구도 탐하지 않았고, 누구도 비교하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그곳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고성과 갈등도 있었으며, 거지와 술 취한 사람도 있었다. 겉모습으로 보면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달랐던 건, 정해진 시간이 되면 모두가 ‘껍질’을 벗고 떠난다는 것이었다. 육신을 벗은 존재들은 형체 없는 빛이 되어 한곳에 모였다. 그 빛들은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어떤 평가도, 부러움도, 죄책감도 없이. 그저 “내가 이런 역할을 해봤어”, “그건 이런 감정이었어” 하는 나눔뿐이었다.


그 장면은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웠다.
‘행복하다’는 말로도 부족했고, ‘쾌락’이나 ‘쾌감’ 같은 감각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이 허용적이고,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었다. 빛들은 각자의 경험을 나누며, 다음 생에선 어떤 역할을 맡을지 상상했다. 마치 배우들이 리허설을 마치고, 다음 장면을 준비하듯 말이다.


깨어나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삶의 이유는 ‘경험’ 그 자체에 있구나. 그 외의 것은 덧붙여진 설정일 뿐.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거지로 태어난 영혼도, 병든 몸을 입은 영혼도, 그 육신의 조건을 통해 어떤 역할을 체험하고 있었으며, 그 역할을 완수하면 다시 빛으로 돌아가 모두와 연결되었다.


가난한 자든, 부유한 자든, 환자든, 직장인이든, 그들은 어떤 질서 속에서 역할을 맡았고, 그 삶의 고락을 겪으며,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누구도 그 역할을 억지로 떠안거나 피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삶이 무대라는 것, 그리고 이 무대는 연습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


결국 우리는 따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본질은 하나의 덩어리로 된 빛이었다.


이 꿈을 꾸고 난 뒤, 나는 지금 이 삶도 그런 원리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 성공이나 실패, 우월이나 열등 같은 잣대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저 경험하고 있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지금의 이 고통도 삶의 일부일 뿐이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내 몸은 힘이 쭉 빠져나갔다. 마치 내 육신이 그 세계의 기억을 단단히 붙잡지 못하도록 순식간에 희미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그 꿈에 사로잡혀 지금의 삶을 허무하게 느끼지 않도록 내 무의식이 스스로 기억을 밀어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지금 이 불안을 ‘없애야 할 감정’으로 간주해 급히 덮어버리려 한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 어떤 역할을 하든, 결국 우리는 몸을 떠나고, 남는 것은 그 몸이 가진 조건이 아니라, 그 몸이 겪은 경험이라는 것. 그 경험이야말로 빛을 반짝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지금의 삶을 조금 다르게 살아보기로. 이 무거운 역할도, 이 두려운 감정도, 이 지친 하루도 ‘연기하듯’ 생생하게 살아내보기로. 그 감정의 소감을 지닌 채, 언젠가 다시 빛으로 돌아갈 그날까지.

지금 나는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혹은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알게 된다면 또 지루할 테니까.


그래도 오늘 하루, 나는 이 역할을 살아낸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빛으로 들려줄 그날을 위해.


흩어져 있는 삶의 조각들을 하나 둘 모으다 보니 많은 에피소드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게 있었습니다.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태도...

그 반복적인 태도가 지금의 글들을 만들어냈다고 봅니다.


앞으로 또 어떤 기록을 남길지...

스스로에게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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